<웰컴 투 렉섬>(2022)

웨일스 북부의 렉섬이라는 소도시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제 축구 경기장이 있다. 1864년에 창설된 축구팀 클럽 렉섬의 주 경기장이자, 몇 해 전까지 렉섬 시민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사람보다 양이 세 배는 더 많다는 웨일스에서도 작은 광산 도시였던 렉섬은 제철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폐광 이후에는 고요함을 잃지 않는 조용한 정경을 늘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렉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양 목장을 고스란히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사람, 특별할 것 없이 늘 같은 루틴으로 일상을 채우고 있는 사람, 그런 까닭에 설마 내 인생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하며 때로 낙심하기도 하는 사람, 그래도 익숙한 펍에 가서 늘 마시는 맥주를 마시며 언제나 응원해오던 축구팀의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렉섬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다.

도시의 연고 팀인 AFC 렉섬은 꽤 오랫동안 영국 최하위 5부 리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재개발이 성행이던 2000년대 중후반, 경기장 부지를 팔아넘길 목적으로 렉섬과는 아무 연고도 없던 외지인이 구단주가 되면서 클럽의 위기가 찾아왔다. 매년 단돈 1파운드의 임대료를 받고 묵묵히 후원해주던 지역 기반의 양조업체에게 경기장을 사버린 구단주의 농간을 알아챈 클럽의 오랜 팬들이자 렉섬의 시민들은 구단주가 살고 있는 지역까지 찾아가 가두시위를 하고 모금 운동을 하는 등 클럽을 지키기 위해 전면으로 나섰다. 경기장을 되찾기 위해서는 10만 파운드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하루 만에 12만 파운드를 모았다.

지역 시민들의 후원만으로 클럽을 운영하는 것은 힘에 벅찼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기장이라는 건 유서 깊은 전통과 그로 인한 명예는 얻을 순 있지만, 그 시간만큼 낙후되었으며 최신식 경기장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관리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했다. 프로 축구팀이지만 5부 리그인 만큼 생계를 위해서는 선수 생활뿐 아니라 투잡을 뛰는 것도 감안해야 했다. 물질적인 자원 부족은 감독과 선수의 질을 보장하지 못했고, 당연하게도 경기력은 계속해서 나빠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클럽을 지키기 위해 십수 년째 자원 봉사를 자처하고 연금을 쪼개어 후원하는 렉섬 시민들은 클럽의 부흥기가 다시 찾아오기만을 바라지만, 그렇게 쉽게 되지 못할 거란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외지인들이 오기 전까지는.

<웰컴 투 렉섬>(2022)

그 새로운 외지인들은 다름 아닌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의 롭 매킬헤니와 <데드풀>의 라이언 레이놀즈였다. 실제로도 필라델피아 출신인 롭 매킬헤니는 노동자 계층이 모여 사는 소도시, 그리고 지역을 대표하는 오랜 전통의 축구팀(물론 필라델피아 이글스는 미식축구팀이다.)이 있고, 그 지역 시민들이 그 축구팀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렉섬을 자신의 고향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심각한 재정난으로 리그 승격을 하지 못하는 언더독 클럽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린 롭은 구단을 사버리기로 마음을 먹고, 자신보다 더 머니 파워가 있는 ‘글로벌 히어로 무비 스타’ 라이언 레이놀즈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이긴 하나, 롭은 TV 시리즈를, 라이언은 영화를 줄곧 찍어왔기에 오프라인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그들은 인스타그램 DM을 통해 처음 대화를 나누었고, 구단주가 되기로 한 후에야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 두 사람이 아무 연고가 없었다는 것, 미국도 캐나다도 아니고 심지어 잉글랜드도 아닌, 웨일스의 AFC 렉섬과도 아무 연고가 없었다는 것, 어떠한 이해관계로도 엮이지 않은 이들은 그저 무구한 선택을 했다는 것. 오로지 언더독 클럽의 짜릿한 승리를 위해서. 이 모든 게 할리우드판 시나리오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다.

렉섬 시민들 역시 갑작스러운 ‘데드풀’ 구단주의 등장에 마냥 달가워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를 따라 레이스코스 경기장에 드나들며 팀 렉섬을 응원했고, 그들의 인생에 아주 중차대한 이벤트가 있을 때도 그날 있었던 경기 스코어로 기억을 적재해왔다. 아흔이 넘은 고령 팬은 아직도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로 렉섬의 우승을 꼽는다. 남편의 죽음을 겪고 난 뒤, 장례를 치르던 순간부터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전부 축구장에서 만나게 된 인연임을 고하며 감사해하는 장년의 여성 팬도 있다. 이제는 희끗해진 머리색을 띠고 있지만 처음 경기장에 갔던 때를 떠올리며 아직도 설레는 팬들도. 14년째 연중무휴 가게 문을 열어두고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던 경기장 인근의 펍 사장이자 오래된 팬도 있다. 이 애정 넘치는 서포터들에게 클럽 렉섬은 일상이고 현실이며, 삶의 근사치다. 그렇기에 백만장자 무비 스타의 고급진 취미생활쯤으로, 또는 영화처럼 그럴싸하고 비현실적인 내러티브의 수단으로 쓰이다가 말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팬들의 불안을 잠식시키기라도 한 듯 롭과 라이언은 최선을 다해 구단을 일군다. 리그 승격 경험이 있는 감독을 기용하고, 상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를 영입한다. 낙후된 경기장을 리모델링하고, 구단을 홍보하기 위해 구단주들이 직접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틱톡과 익스피디아 광고를 따낸다. 소셜 미디어를 해본 적 없는 렉섬의 노년층 팬들이 직접 틱톡 앱을 다운 받고 구단 계정에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시간이 멈춘 듯 적요하고 느린 도시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코로나로 인해 경기를 보러 올 수 없었던 관객들도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다.

<웰컴 투 렉섬>은 구단의 공동 회장인 롭과 라이언이 영국 최하위 리그 팀 렉섬의 부흥을 이끌기 위한 과정을 담고 있다. 승격을 목표로 하는 여정이기는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오래된 도시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팬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늙고 낡고 낙후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익숙하고 그리하여 평안한 것. <웰컴 투 렉섬> 시리즈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오래된 사람들이 건네는 든든하고 단단한 응원. 그 응원에 대한 화답일까. 며칠 전, AFC 렉섬이 마침내 프로 리그로 승격했다. 45라운드 34승 8무 3패. 15년 만의 일이다.

 <웰컴 투 렉섬>(2022)
OTT 디즈니 플러스
원제 Welcome to Wrexham
시놉시스
할리우드 초짜 구단주와 웨일스 약체 축구팀이 만났다! 라이언 레이놀즈와 롭 매킬해니는 렉섬 축구 클럽과 지역사회에 새로운 희망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응원하고 싶은 약자의 감독적이면서 유쾌한 서사를 담은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