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아이즈, [Brown Eyes], 2001
고3 때였다. 아침 7시까지 학교에 가서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오면 자정이 넘었다. 일요일에도 학교에 갔으니, 열아홉의 내 삶은 학교와 혼연일체였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졸음이 쏟아지면 선생님의 눈을 피해 삼십 분 정도 단잠을 잤다. 그렇게 피로를 풀고, 공부와 인연이 없는 친구 몇 명과 바닷가에 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셨다.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용두암 앞바다가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집어등을 켠 배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시간. 눈부신 불빛이 왠지 얼른 제주를 벗어나 서울로 탈출하라는 신호 같았다. 수능을 앞둔 제주도 고등학생 중에는 ‘이스케이프 아일랜드’를 꿈꾸는 녀석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니,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왜 밤까지 남아서 공부하는 시늉을 했는지, 왜 일요일에도 학교에 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도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좋았나 보다.

그렇다고 인생의 한 번뿐인 열아홉, 그 소중한 시간을 허송세월 보내지는 않았다.

교무실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챙겨다가 꾸준히 보았고, 시사 주간지도 꼼꼼히 읽었다. 역사 교과서 대신 역사 인문학 책도 열심히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PD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사매거진 2580> 등 시사교양 방송도 틈틈이 시청했다. 나만의 공부였다.

그러던 중, 도서관에서 어떤 단편소설집을 보았는데, 불현듯, 갑자기, 느닷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뚱딴지같은 마음을 먹었다. 차마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꿈을 말할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그렇게 나만의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신 차리라고 눈총을 주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굴하지 않고, 보란 듯이 ‘마이웨이’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고3 때, 라디오를 듣는 습관도 생겼다. 새벽에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갈 때,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무렵, 가장 많이 들은 노래가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년>이었다.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서 하루에 여러 번 듣는 날도 있었다. 마음을 흔드는 가사, 호소력 강한 목소리, 멜로디가 인상적이었고 특히 ‘I believe in you, I believe in your mind’로 시작하는 간절한 후렴구가 귓가에 맴돌았다. 노래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답답한 고3 생활이 얼른 끝나, 내년에 이 노래를 들으며 ‘벌써 일 년이나 지났네!’ 이렇게 중얼거리고 싶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교실 창가에 기대어 제주 바다를 보고 있으면, 당장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 노래는 지루한 고3의 시간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신묘한 주문이었다.

그렇게 브라운 아이즈의 팬이 되었고 지금도 마음이 스산할 때마다 <with coffee>, <그녀가 나를 보네>, <점점>, <비 오는 압구정>, <이 노래> 등을 듣곤 한다.

<벌써 일년>을 처음 들은 지 어느덧 벌써 이십여 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그 노래를 들으며 꾸었던 꿈을 아직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벌써 일년’ 그 명곡처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듬으며 희망을 주는, 생명력이 긴 작품을 쓰지 못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

그 멋진 노래를 들으며 꿈을 꾸던 열아홉 청소년은 그사이 중년 초입에 들어섰다.

흐릿해진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흘러간 시간이 야속하네! 혹은 시간이 유수와 같아! 이런 익숙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남은 내 삶에서 오늘,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날이니까. 오늘이 가장 열정적이고, 또 마음껏 도전할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