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OST, 2013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듣는 노래가 있다. 방금까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나눈 대화가 오랜만에 즐거웠을 때, 그중 어떤 이야기가 내 안에 작은 불을 켜주었단 걸 느낄 때, 취기가 오른 채로 광역버스의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댈 때, 혹은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탔을 때, 멀리 도심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서울에 온 지 몇 년이나 되었구나 하고 지나간 세월을 손꼽아 볼 때……. 어김없이 내 귓가엔 같은 앨범이 재생되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의 귀가 리추얼이 된 앨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O.S.T.다. 

첫 곡인 ‘Step Out’의 드럼 소리가 시작되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뛴다. 하루 종일 세상일에 닳은 마음이 순식간에 압축되며 빈 공간이 생기고, 그 여백에 아름답고 광활한 풍경이 들어찬다. 불과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의 검푸른 바다, 압도적인 풍경의 히말라야 설산…. 앉은 채로 떠나는 여행 같기도 하고, 눈을 뜨고 꾸는 꿈같기도 하다. 내게는 유일무이한 공감각적 심상의 앨범인 셈이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듣는 것만으로 단숨에 경이로운 풍경 속에 서 있게 하는 노래가 있어서, 그런 노래를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에서 주인공 월터는 <라이프> 매거진의 사진 관리부서에서 16년간 성실히 일해 온 남자다. 아버지의 죽음 후 이른 나이부터 가족을 부양하느라 매일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던 그는 어떤 계기로 <라이프> 마지막 호 표지를 장식할 필름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된다. 늘 사진으로만 목격해온 바로 그 세계 속으로. 물론 여기서부터 관객의 모험도 함께 시작된다. 좌석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듯 눈을 빛내며, 발바닥에는 힘을 꽉 주게 되는 것이다. 월터의 곁에서 파도가 일으킨 포말을 온몸으로 맞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을 심장이 뻐근해지도록 달리다가 문득 생각한다. 아, 그래, 여기가 전부가 아니지, 세상 어딘가에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있지…. 그런 자각은 좀 더 깨어 있고 싶다는, 한번쯤은 사는 것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관객을 이끈다.

나도 떠나기 전 월터의 마음을 안다. 20대를 지나는 동안 나를 흔든 건 늘 이런 문장들이었으니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의 일부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돌아보면 그때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내가 나를 다 모른 채로 나의 일부만 경험하고 살게 될까 봐, 더 멀리 더 깊이 더 치열하게 살아볼 수도 있는데 망설이다가 이 삶을 덜 산 채로 남겨두게 될까 봐. 내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늘 ‘미진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그래서 자꾸 낯선 곳으로 떠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에서라면 다른 내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내가 어디까지 살아볼 수 있는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어서. 월터처럼 사진으로만 보던 세계를 실제로 대면해야 했다. 뜨거워하고 차가워하며 긁히고 부딪치며 삶을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었다. 

그 시간을 다 지나온 지금은, 더 이상 현실을 잊게 해줄 백일몽이 필요해 이 앨범을 듣는 게 아니다. 여기를 버리고 갈 수 있는 ‘거기’란 건 없다는 걸 안다. 지금 내가 ‘원하는 바로 그곳’에 있지 않아 불행하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물론 지금도 낯선 곳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모험을 통해 만나는 몰랐던 나는 여전히 흥미롭다. 나한테 이런 면도 있구나, 발견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답을 찾아 동그라미를 치는 기분이 든다. 

다만 동시에 내가 일군 지금의 안정 또한 권태로 느끼지 않는다.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만큼 아는 곳을 반복해 걷는 산책이 좋아졌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그 장소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속해 있을 것인가 하는 일이니까. ‘정착’은 한 자리에 고여 있는 따분한 일이 아니라 나의 자리라고 느껴지는 곳에 잘 머무는 일이란 걸 안다. 떠나는 행위가 도망이 되지 않을 때만이 눈앞의 풍경을 온전히 껴안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 전 친구에게 어른이 된 후로 무얼 잊고 사는 것 같으냐고 물은 적 있다. 친구는 소설을 읽다 밑줄 쳐둔 문장과 함께 이런 답을 보내왔다. 내가 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나 자신에 대한 상상력을 점점 잃어간다고. 그 얘기에 고개 끄덕거리다가 그제야 이 앨범이 내게 늘 여행 가방처럼 느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루를 닫으며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음이 한 뼘 정도 들뜨거나, 사는 일이 내 맘 같지 않아 울적해질 때, 이 노래를 들으며 내가 상기하는 것은 어떤 ‘가능성’이다. 

이 버스가 도착하는 곳이 이국의 땅이길 바라는 불가능한 열망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곳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손끝으로 만져보는 일. 내가 어디서든, 어떤 모양으로든 살아볼 수 있는 용기와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걸 잊지 않는 일. 가보지 못한 땅은 더 이상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그곳에 있지 못해 우울한 내가 아니라, 언제든 그곳에 갈 수 있는 나와 살고 있다고 느끼니까. 그럴 때 ‘Step Out’을 부른 호세 곤잘레스와 ‘Dirty Paws’를 부른 아이슬란드 밴드 오브 몬스터즈 앤드 맨이 차례로 귓가에 속삭인다.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어디든 갈 수 있어. 자유를 손에 쥔 채 자신의 가능성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진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는 법이라고.

내가 매 순간 여기에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매 순간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잊지 않게 해주어서 나는 이 노래들이 좋다. 보이지 않는 여행 가방을 든 내가 지금 먼 데로 떠나는 동시에 내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버스 안에서 오직 나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