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2021)

세계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다. 이런 생각을 하며 버텼던 시기가 있었다. 이 세계가 지닌 유구한 갈등의 역사와 이해 불가능한 숫자들 틈에서 나라는 중생은 너무나 작고, 그러니 그 중생에게 일어난 사건은 더 작고 작다고 여겼다. 내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 훼손된 마음 같은 건 경미한 후유증에 불과하고, 마데카솔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기 마련이라고. 허나 새살이 돋은 자리 밑에는 분명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고, 오랜 퇴적으로 인해 상흔의 아웃라인은 더 선명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을지 모른다. 겉에 없고 밑에 있을 뿐이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세계는 언제나 불가해한 일들로 복작복작하고, 정말 큰일은 내게서 아주 멀리 있는 일들이고, 그러니 내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은 일어난 적도 없었던 일이라고 반복해서 내가 나를 작고 작게 만드는 이 일련의 사고 과정은 상흔이 매우 깊은 사건을 겪고 나서 발현되는 후유증이기도 하다. 내게 닥친 비극으로부터 나를 빼내 오려 발버둥 치는 것. 일견 지극히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는 회피에 가깝다. 아니, 회피가 아니라 도피다. 그러나 아무리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부터 탈주하려고 해도, 내가 입은 피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HBO 시리즈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 I may destroy you>의 주인공 아마벨라 역시 한동안 이러한 분열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세상에는 더 위험하고 끔찍한 일들로 가득하고, 그 거대하고 참혹한 일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피해 경험은 별것 아니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원고를 쓰기 위해 밤새 출판사 작업실에 있게 된 그녀는 마감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평소처럼 친구들과 함께 바에 놀러 가 술을 마시며 신나게 춤을 추고 놀다가, 어느 낯선 이가 건넨 술을 먹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날이었고, 그녀는 작업실 테이블 위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단순히 술에 취해서 블랙아웃이 된 줄 알았던 아마벨라는 샤워를 하다 말고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을 마주하게 된다. 불현듯 잘린 필름처럼 분절된 이미지들이 떠오르고, 이윽고 그녀는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체감한다.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는 성폭행 피해를 겪은 아마벨라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든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마벨라의 친구들인 콰미와 T 또한,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시 돌아보고, 그것이 자신이 겪은 ‘피해’ 경험이었음을 알아가기도 한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형적인 모습은 당연하게도 찾아볼 수 없다. 데이팅 앱을 통해 섹스를 하기로 합의한 당사자들끼리도 원치 않는 섹스가 강요되거나 완력에 의해 섹스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강간이고, 우연히 만나 자연스러운 흐름에 이끌려 관계를 가졌는데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과정이 전부 의도적으로 계산된 행위였다면 그것은 계획형 성범죄다. 그러나 거부하겠다는 완강한 의사 표현이 있었느냐, 라는 물음 앞에서, 위와 같은 성범죄 유형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일은 다분히 어렵다. 성범죄는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고, 피해를 겪은 이들은 깊은 자책의 수렁에서 더없이 오래 머물게 된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일 거라고, 세상에는 이보다 더한 끔찍한 사건 사고가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상처의 무게를 한없이 작게 만들어버리는 아마벨라처럼.

내게 벌어진 일이 ‘원치 않았던’ 경험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는 것. 아마벨라는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합의한 성관계를 치르다가 상대방이 동의 없이 콘돔을 제거한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신이 한 행동은 내게 피해를 주었고, 당신은 범죄를 저지른 자라는 걸 그녀는 상대에게 제대로 짚어주었다. 폭력이 전면에 드러나는 약물 강간 피해 경험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해도, 상처의 무게에 차등은 없다는 걸 그녀는 이제 알고 있다.

가난한 계층의 흑인. 성폭행 피해 경험 이전까지 그녀에게는 인종과 계급이라는 정체성이 더 주요하게 작용했으리라 보이는 에피소드가 있다. 오래전 함께 학교에 다니던 급우(백인-여성)가 자신의 성적 피해를 주장했을 때, 남성 가해자가 자신과 같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마벨라는 정황을 다 이해하려 들지 않고, 백인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 한다고 가해자와 연대했던 적이 있다. 그 일로 백인-여자였던 급우는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모의한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그 급우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했어야 한다는 것을, 아마벨라는 아마도 그때는 몰랐을 터. 현재의 아마벨라는 성폭행 피해 경험 자조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급우를 찾아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그녀와 연대한다. 한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정체성들 속에 겹쳐지는 존재인지를, 또한 한 사람의 연대기 안에서는 그 상충되고 반목되기 쉬운 갈등이 때로는 교차되고 연쇄되며 확장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 수 있는지를. 그러므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시도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아마벨라를 보며 체득할 수 있었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 나의 경험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고, 서사 속 인물이 갖는 감정을 직간접적으로 흡수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서사에 기댈 수 있는 본질적인 힘은 결국 이것 아닐까. 나와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사건과 숫자들 속에는 사람이 있고, 계급도 인종도 성적 지향도 체제도 상황도 다른 사람의 경험과 그로 인해 수반되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작은 희망. 세계가 너무 커 보일 때,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나 싶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일들로만 가득한 것 같을 때, 나는 서사가 우리에게 주는 힘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지 않다.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2021)
OTT 웨이브(wavve)
원제 I may destroy you
감독 샘 밀러, 미케일라 코얼
출연 미케일라 코얼, 웨루체 오피아, 파파 에시에두
시놉시스
작가 아라벨라는 마감에 쫓기던 어느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가 약물에 의한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