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 틱… 붐!>(2021)

무언가를 듣고 보고 읽고 나서 가슴이 뛸 수 있고 벅차오를 수 있는 상태. 지나가는 찰나의 장면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하고, 기억하기로 한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건 쉽지 않다. 내가 캡처하기로 한 장면들 속에 머무를 수 없게끔, 생활은 매번 나를 구체적인 상황에 빠트린다. 삶은 구체적인 상황에 속해 있다가 벗어나고 또 다시 속해 있다가 벗어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상황을 만드는 건 내가 아니야, 하다가도, 결국에 이런 상황을 자초한 건 과거의 나 아닌가? 하는 좌절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윤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어른이 되면 어떤 일들은 쉽게 벗어날 수 있고,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감당할 몫을 제법 여유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무뎌지고 마모되는 건 내가 듣고 보고 읽는 것들로부터 얻게 되는 고양된 감정일 뿐이다. 더욱이 감각을 느끼는 온도가 약간이라도 높아지는 것 같다 싶으면 애써 그것을 누르려고 할 때도 있다. 워워, 차분하게 다시 곱씹어봐. 그래도 좋으면 진짜 좋은 거야. 나는 충동구매를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감정을 얼린다. 그러나 예술로부터 얻게 되는 가슴 벅참과 떨림이라면 얼마든지 충동적으로 굴어도 되지 않나? 마음이 동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거니까.

어떤 자극이든 내게 잘 스며들 수 있게 늘 몸과 마음을 정비하기로 결심하곤 하지만, 때로 생활에 스며들다 못해 짓눌려서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압도당하게 된다. 내가 원한 건 이런 압도가 아닌데. 영화 <틱, 틱… 붐!>의 주인공 조나단은 예술적인 경도와 생활의 압박 사이에 놓여 있다. 서른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조나단은 8년간 몰두했던 뮤지컬 초안 워크숍을 며칠 앞두고 있다. 제작자 및 공연 관계자들에게 작품을 선보이는 첫 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무대. 그는 공연 전날까지 마지막 한 곡을 쓰지 못한다. 관객이 있는 뉴욕을 떠나 외곽 지역에서 무용 수업을 하기로 한 애인은 그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해온다. 어린 날, 함께 세상을 바꿀 만한 멋진 공연을 만들자고 도원결의를 다지던 22년 지기 친구 마이클은 배우를 관두고 광고 회사에 입사해 안정된 삶을 살기로 한다.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마이클은 더 이상 전기세를 내지 않으면 공급을 끊겠다는 최후통첩장이 나뒹구는 어지럽고 좁아터진 곳이 아닌,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는 멋들어진 곳에 산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더 이상 서빙하는 작가가 아니라, 글 쓰는 게 취미인 웨이터가 되는 거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브런치 카페에서 일한 지 5년. 손드하임이 데뷔했을 때 나이보다 자신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혁명에 가까운 천재적인 작품을 세상에 내보였다는 것에 조나단은 극심한 초조함을 느낀다. 글 쓰는 게 취미인 웨이터는 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온 신경을 작품에 집중할 만한 여력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기가 끊어지더라도 뮤지션에게 줄 돈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 당치도 않은 말이다. 온전히 작품에 집중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작품에 집중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구체적인 상황 속 조나단은 예술적인 경도와 생활적인 압박 사이에서 무엇에 더 무게를 둘 것인지 당장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또 다른 압박을 받는다.

<조앤 디디온의 초상>(2017)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어떤 가능성의 세계가 점점 좁아지는 것이라고 여긴다. 기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타임라인에서 지극히 아주 짧은 분량만을 담당할 뿐인데도. 그래서인지 시간을 장악하기보다는 시간에 저당 잡히며 살아가게 된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불안과 초조함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다가올 미래(내지는 종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여기-오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을 제대로 직면해야만, 내일의 내가 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 혹은 가능성의 세계가 변화하고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촉박한 심정으로 <조앤 디디온의 초상>을 보았다. 미국에서 시작된 뉴저널리즘 계보의 작가 조앤 디디온은 본래 뉴욕이 아닌 새크라멘토에서 나고 자랐다. 스무 살이 되던 무렵, 어머니의 권유로 보그 지에 에세이를 발표하며 에디터로 일하게 된 그녀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펴냈다. 문화예술의 격동이 가장 크고 찬란했던 1960년대를 관통하는 동안 그녀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대변하고 고스란히 글에 담아냈다. 새크라멘토에서 뉴욕으로, 안정된 뉴욕의 생활을 접고 로스앤젤레스로 운신의 폭을 옮겨가며 그녀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술적인 교류의 자장 안에서 더 날카롭고 기민하게 세상을 관찰할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시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의 타임라인을 내가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 그렇게 되면 지금-여기-오늘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틱, 틱… 붐!>에서 마이클은 조나단에게 묻는다. 네가 예술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사랑 때문이냐, 하지 않으면 안 될 두려움 때문이냐. 조나단은 워크숍이 끝나도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서른이 넘어서 뮤지컬 <렌트>를 썼다. 아마도 마이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계속해서 유보되었을 것이다. 그의 에이전트 말처럼 작품을 다 쓰면 다음 작품을 쓰고, 또 다시 다음 작품을 쓰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려움이냐, 사랑이냐.
그 대답을 이미 실천한
조앤 디디온, 그리고 조나단 라슨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틱, 틱… 붐!>(2021)
OTT NETFLIX
원제 tick, tick… BOOM!
연출 린마누엘 미란다
원작 조너선 라슨
극본 스티븐 레벤슨
출연 앤드류 가필드, 알렉산드라 십, 로빈 데 헤수스, 버네사 허진스
시놉시스
서른 살 생일을 코앞에 둔 유망한 작곡가. 사랑과 우정뿐만 아니라 심적 압박도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시간이 다하기 전에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조앤 디디온의 초상>(2017)
OTT NETFLIX
원제 JOAN DIDION : THE CENTER WILL NOT HOLD
연출 그리핀 던
출연 조앤 디디온
시놉시스
미국 문학계의 거물 조앤 디디온. 그녀가 자신의 놀랍고도 인상적인 경력과 개인적인 고난을 회고한다. 조카 그리핀 던이 연출한 친밀하고 사적인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