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발광 제시카 제임스>(2017)

나짱리즘이여, 돌아와라

20대 초반 즈음 내 스스로 지은 별명이 있다. 일명 ‘나짱리즘’. 단어의 조합만 봐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풀어 말하자면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짱이고, 실제로 정말 짱이다.’라는 뜻이다. 그때의 나는 내가 정말 짱인 줄 알았다. 나는 잘 써. 나는 대단해. 근자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잘’이라 함은 결과물이 좋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나는 진짜 열심히 산다고 자부할 수 있다는 태도에 가까웠다.
내 인생을 통틀어 의욕과 의지, 성실과 노력이 가장 피치에 다다랐을 시점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했고, 과대표를 자처하며 매학기 최선을 다해 작품을 써냈으며, 방학 중에도 자의적으로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학점은 최악(교양과목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그래서 2학기를 더 다녔다. TMI 죄송합니다.)이었지만, 나름 소설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제대로 놀았다. 날마다 “와, 나 오늘도 잘 살았다. 진짜 난 짱인 것 같아.”라며 흐뭇하게 잠에 들곤 했다.

부끄러운 나의 자기도취적인 과거사를 언급한 이유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자체발광 제시카 제임스>의 주인공인 ‘제시카’는 20대 중반의 극작가다. 자신의 작품이 무대 위에 올라가는 날만을 기다리며, 그는 여러 극단과 기관에 대본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매번 거절을 당한다. 그럼에도 제시카는 괘념치 않는다. 이번에는 안 됐나보지 뭐, 그럼 다른 데에다 보내보면 돼. 물론 그에게도 감정의 기복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다. 거절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태를 ‘결론’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탈락, 거절, 반려. 이런 단어들에 자신의 삶이 휘둘리지 않게끔 제시카는 언제나 박차고 일어선다. 그는 극단의 반려 문서를 벽에 하나씩 붙여놓는다. 그렇게 붙은 문서가 벽 한 쪽을 다 메울 지경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계약서나 상장을 걸어둔 것도 아니고, 거절 문서를 붙여놓다니. 이 얼마나 위대하고 당당한 도약의 마음가짐인가.
물론 그런 제시카에게도 약점이 있긴 하다. 전 남자친구에게 차인 이후로, 끊임없이 전 남자친구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염탐한다. 헤어진 지 두세 달도 안 되어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걸 알고 분노하는 제시카는 친구를 통해 이혼남인 분을 소개 받는다. 분 역시 전 와이프의 소셜미디어를 몰래 찾아보는 게 일상이었기에 그들은 공통분모를 통해 조금씩 친해진다.

영화는 젊은 여성 예술가의 삶을 매우 발랄하고 경쾌하게 그려낸다. 사실 제시카의 현재 상황은 제3자가 보기에 그리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영화의 톤 자체가 심각하고 우울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그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크게 상관하지 않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제시카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 인생 참 낙관적이어서 좋겠네, 하고 빈정대면서. 그런데 곱씹어 생각해보니 제시카는 10년 전의 나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고 조금 소름이 끼쳤다. ‘나짱리즘’을 동력 삼아 적극적으로 살던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조건 달려들던 내가, 비록 상황이 나빠진다 하더라도 난 뭐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뻔뻔하게 굴던 내가, 지금의 나와 마치 타인이 된 것처럼 완전하게 분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소설가가 된 후로 나의 ‘나짱리즘’ 이론은 쇠락한 사조가 되었고, 연차가 쌓이는 것에 반비례하는 자신감이 나를 점점 더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됐을까? 반추하고 싶진 않다. 극적인 사건들, 타인과의 비교, 글만으로는 돈을 벌 수 없는 경제적인 문제.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게 있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 제시카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인 세라 존스라는 선배를 만난다. 토니상까지 받은 그는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면서 “글 쓰면서 많은 돈을 바랄 생각이었어? 원래 그런 거지.”라고 말한다. 자신의 미래 모습이리라고 동일시하던 세라 존스의 현실을 보며 제시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럼에도 또박또박 다시 걸어나가려는 제시카를 보며, 나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제목에도 등장하듯 영화 속 제시카는 빛이 난다. 내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제시카보다 훨씬 더 반짝반짝 빛나던. ‘나짱리즘’을 다시 계승할 수 있을까? 나짱리즘의 차현지는 타인의 인정과 경제적 환원이 우선이지 않는다. 내 삶을 내가 끌어갈 수 있는 마음. 나를 작고 작게 줄이지 않고, 계속 넓고 넓혀가는 태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승부하고자 하는 다짐. 그게 곧 다시 나를 ‘짱’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사랑하는 걸 업으로 삼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어쨌거나 나는 소설을 사랑하고, 그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 전제만으로도 나는 이미 짱인 게 아닐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크랙의 시대 : 코카인에 물들다>(2021)

우리 엄마는 약물중독자예요

요즘 <커밍 업 쇼트>(제니퍼 M. 실바 지음, 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 출판사)라는 책을 읽고 있다. 지금 청년들이 갖는 ‘경제적 자립’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내용인데, 작가는 실제 청년들을 직접 인터뷰이로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을 사례로 예를 들며 논의를 전개한다. 그중 흥미로웠던 것은 부모와의 감정적인 분리를 원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대기를 훑다보면 “약물중독자인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언급이 꽤나 담겨 있다. 특히 흑인인 경우, 마약중독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경험이 백인 인터뷰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다. 이들의 부모는 어째서 약물중독에 빠지게 되었을까?
나는 그 해답을 <크랙의 시대: 코카인에 물들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미국과 유럽을 강타했던 1980년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약물중독자와 밀매범, 특히 유색인종의 범죄율이 치솟게 된 이유를 시대순으로 자세하게 전해주는 이 영화는 한 개인의 문제가 얼마나 정치적, 사회적 맥락과 닿아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크랙, 이라는 변형 약물은 백인 엘리트 계층의 파티에서나 볼 수 있던 값비싼 코카인 대신, 무척 저렴하게 유통되며 흡입과 동시에 금세 취하게 된다는 편의 때문에 삽시간에 서민 계층에게도 전파됐다. 도시의 변두리에 살면서 희망찬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취약한 흑인 계층은 자연스럽게 크랙을 파는 것으로 돈벌이를 삼게 된다. 동네 골목 어귀에서 놀고 있던 어린 청년층에게도 크랙을 파는 게 일종의 직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흑인 뿐 아니라 모든 인종이 모두 크랙에 중독된 시기였으나, 마약상이 하나의 직업으로 정체화된 흑인 계층에게는 특히 타격이 컸다. 흑인이 모여 사는 동네에는 마약을 투약하는 자와 마약을 파는 자가 뒤섞인 채 돈벌이의 수단, 그리고 중독자의 모습을 띠며 점점 헤어나올 수 없는 양태로 변모해갔다.
미국 전 지역이 마약으로 들끓는 현상에 “Just say no”라는 약물 근절 캠페인을 벌인 낸시 레이건을 시작으로, 정부 당국은 마약범을 중범죄로 인지, 처벌하기 시작했다. 마약은 흑인들이나 하는 거다, 흑인들이 크랙을 퍼뜨리고 있다는 식의 이미지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가난한 흑인 여성이 돌봄 노동도 마다한 채 크랙 중독자가 되었다는 보도부터, 임신 상태에서 크랙을 흡입한 여성의 태아 역시 마약 중독으로 태어난다는 날조된 뉴스들이 판을 치면서, 흑인 여성들을 기소하는 일들도 잦게 벌어졌다. 공권력은 더 강화되었고 마약범으로 기소돼 교도소에 수감된 흑인 비율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높아졌다. 일례로 조지 부시는 취임과 동시에 마약 확산을 막겠다는 선언을 했고, 마약단속국은 10대 청소년을 먼저 꼬드겨 섭외하고는 마약을 거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찍어 매체에 보도하는 어마어마한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그 청소년은 단속국의 제안에 수락했을 뿐이었는데도, 실제로 10년형의 징역 처분을 받았다.

근래 다시 흑인 인권 운동이 점화된 데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전제한다. 흑인은 게으르고 사회 공헌에 이바지할 마음이 없다는 편견은 크랙이라는 신종 마약이 발생하면서부터 수없이 많은 사건들로 축적된 이미지다. 군대화된 경찰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들을,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가끔 마약 중독에 시달리는 유명 연예인들이 일명 REHAB이라 불리는 치료 센터에 입원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봐왔다. 중독은 치료이지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재활센터에도 갈 수 없을 만큼 빈곤한 취약 계층에게 중독은 그저 처벌의 대상이고, 교도소의 수감자로 낙인찍힐 뿐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은 차치해두고, 왜 우리는 소수 계층을 계속 그 상태로 위치시키는지를,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시스템 속에 자라나 어떻게든 허들을 넘어야 한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옥죄는지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허들을 넘으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어떤 이들에게는 결코 낮아지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것을. 그런 이들에게 네가 그 위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네가 유약해서야, 네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야, 라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과연 온당한가를.
마약중독에 시달리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에게 독립은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성공에 대한 목표치가 그리 크지도 않다. 다만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자신의 어린 시절과 더 이상 연결되고 싶지 않다는 게 그들이 정의하는 독립이다. 부모와 완전히 연을 끊고 새로 시작하려는 것부터가 그들의 출발점이라는 게 씁쓸했다. 만일 그들에게 재활 치료가 가능한 경제적인 자본이 있었다면, 취약계층에 대한 정부 당국의 지원이 조금 더 윤택했다면, 그들은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와 함께 앞서 언급한 책을 함께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자체발광 제시카 제임스>(2017)
The Incredible Jessica James
OTT Netflix, 다큐멘터리
감독
 짐 스트라우스
주연 제시카 윌리엄스, 크리스 오다우드, 러키스 스탠필드
시놉시스
뉴욕시에서 극작가로 일하는 주인공 제시카. 끔찍한 이별을 겪은 후 의욕 없이 지나가던 그녀의 일상은 앱 디자이너 이혼남을 만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크랙의 시대 : 코카인에 물들다>(2021)
Crack: Cocaine, Corruption & Conspiracy
OTT Netflix, 다큐멘터리
감독
 스캔리 넬슨
시놉시스
실업률이 치솟은 80년대 미국, 싸고 강력한 마약이 전국에 퍼진다. 그렇게 시작된 크랙의 시대. 흑인 사회, 나아가 미국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복잡한 역사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