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일 “솔직한 가사, 에둘러 말하지 않는 방식, 그게 좋았어요.”
2021 <월간 윤종신>은 기존에 발표되었던 노래를 새로운 편곡으로 다시 선보이는 ‘리페어’로 꾸며진다. 리페어의 시작을 알리는 곡은 윤종신 8집 [헤어진 연인들을 위한 지침서]에 수록되어 있는 ‘잘 했어요’. <월간 윤종신>과 남다른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는 뮤지션 정준일이 이 곡을 직접 선택하고 불렀다. 2011년 6월호 ‘말꼬리’ 2014년 10월호 ‘고요’에 이은 세 번째 참여다. 윤종신과 정준일이 그간의 작업과 ‘잘 했어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직한 가사, 에둘러 말하지 않는 방식, 그게 좋았어요.”
윤종신(이하 윤) 흔쾌히 참여해줘서 고마워요. 리페어를 준비하면서 준일 씨한테 제일 먼저 참여가 가능한지 물어본 것 같아요. 이번에는 참여하는 싱어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 싶어서, 혹시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먼저 알려달라고 했는데요. 정준일 씨는 ‘잘했어요’를 선택했습니다.
정준일(이하 정) 제가 부르고 싶은 곡들 너덧 개를 말씀드렸었는데요. 봉태규 씨가 부른 ‘처음 보는 나’나 ‘모처럼’, ‘이별을 앞두고’, 그리고 ‘잘했어요’가 있었죠.
윤 그중에서도 특히 ‘잘했어요’ 고른 이유가 있을까요?
정 어렸을 때부터 종신이형 노래를 좋아했어요. 처음 형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때가 초등학교 때였거든요. ‘오래전 그날’이요. 엄마랑 동네 스케이트장에 갔는데, 스케이트장 디제이가 그 노래를 두 시간 내내 틀어주더라고요. 스케이트장을 나올 때쯤에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게 됐죠. 그때 이후로 앨범을 사기도 하고 또 따라부르기도 하면서 팬이 되었던 것 같아요. 특히 ‘잘했어요’가 들어 있는 8집 [헤어지는 연인들을 위한 지침서] 앨범은 통으로 좋아했어요.
윤 특별히 ‘잘했어요’의 어떤 점에 끌렸을까요?
정 처음부터 흡입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노래가 크다고 해야할까. 뒤로 갈수록 펼쳐지는 분위기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음악을 좋아했었거든요. 그리고 솔직한 가사. 에둘러 말하지 않는 방식. 그게 좋았어요.
윤 이 노래는 사연이 있어요. 군대 제대하고 발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서른 한 살 때였을 거예요. 하림이가 쓴 곡이었고 듣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이거 나 줘’ 한 거죠. 원래는 기념일을 축하하는 세레나데 노래였어요. 그런데 저는 듣자마자 멜로디가 너무 슬프더라고요. 하림이한테 미안한데 가사는 바꾸겠다고 하고, 옛 엿인을 잊지 못한 채로 혼자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만들었죠. 사실 ‘배웅’도 그랬거든요. 원래 하림이가 썼을 때는 우정에 대한 얘기였는데, 제가 가사를 이별 얘기로 바꾼 거예요. 그땐 모든 노래를 슬프게 만들던 시기였거든요. 저의 개인적인 사연이 담긴 노래예요.
정 실제 헤어진 얘기를 쓰신 거예요?
윤 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얘기였죠. 원래는 이 곡을 8집의 타이틀곡으로 할까 생각도 했어요. 그 당시 석원이형도 이 곡을 밀자고 했거든요. 근데 저는 너무 내 얘기인 것 같아서 오히려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타이틀로 밀었던 게 ‘Annie’였고, 잘 안 됐죠.
정 ‘Annie’ 잘 되지 않았어요?
윤 잘 되는 건 앨범을 내자마자 폭발적으로 반응이 와야하거든요. 근데 내 노래는 스물스물 퍼져요. 무슨 노래를 낸 지 4년 뒤에야 좋아하더라고.(웃음) 항상 오래 걸려요. ‘말꼬리’도 그렇잖아요.
“‘말꼬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윤 준일 씨와는 2011년에 ‘말꼬리’를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인연이 닿았죠. 그때 정치가 준일이란 친구가 있는데, 형 노래를 좋아한다고, 한번 노래를 시켜보자고 소개를 해줬거든요.
정 녹음실에서 처음 뵈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 다른 자리에서 뵌 적도 없었고 오다 가다 인사를 드린 적도 없었거든요.
윤 녹음하면서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놀랐어요. 밴드 음악을 하기도 했었고 발표한 곡들이 스트레이트한 느낌도 있어서 준일이를 락커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실제로 노래를 시켜봤는데 느낌이 되게 여린 거예요. 목소리에 잔떨림도 많고요. 제가 처음에는 준일 씨 창법을 고치려고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그림에 가깝도록요. 그런데 그게 오판이었던 거죠. 사람들이 정준일 창법을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 잔떨림이 호소력 있게 다가갔던 거죠. 그 작업은 이후의 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요즘은 싱어의 개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따라가려고 하거든요. 곡을 쓸 때도 너무 미리 그려놓지 않고 현장에서 싱어가 하는 걸 보고 그 사람한테 맞는 방향을 찾아보려고 하죠.
윤 ‘말꼬리’는 <월간 윤종신> 안에서도 스테디하게 사랑 받고 있는 곡 중 하나인데, ‘말꼬리’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어요?
정 제가 그 당시 화성이 화려했던 노래를 좋아해서 처음 듣고는 솔직히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가사와 같이 보니까 이게 한 세트라는 게 이해가 되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꾸준하게 사랑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제가 공연이나 페스티벌에 나가면 이 곡을 가끔 부르는데, 이 곡은 전주만 나와도 함성이 나와요. 처음에는 활동을 한 곡도 아닌데 다들 어떻게 아실까 의아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윤 2014년에는 ‘고요’에 참여했는데, 개인적으로 ‘말꼬리’와 ‘고요’ 중 어떤 노래를 더 좋아해요?
정 저는 ‘고요’를 더 좋아해요. 콘서트에서 이 두 곡을 연이어 부를 때가 있는데, 저는 늘 ‘고요’가 더 좋다고 말씀드려요.(웃음)
윤 ‘고요’를 녹음할 때는 저는 디렉팅을 거의 안 했죠. 준일 씨가 부르는 걸 감상만 했어요.
정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윤 ‘고요’는 제가 가진 발라드 기교를 많이 동원한 곡이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헤어지는 두 남녀의 마지막 장면을 그리고 있거든요. 대사도 없이 롱테이크로 가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썼죠. 준일 씨가 노래를 정말 잘해줬어요. 고마운 싱어예요.
정 ‘고요’는 더 많이 알려져야 하는 노래예요.
윤 싱어로서 윤종신의 발라드는 어떤 느낌인가요?
정 세련된 느낌을 주진 않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하는 거 같아요. 누가 들어도 자기 얘기처럼 느끼는 보편성이 있거든요. 그건 공감에서 나오는 거잖아. 가사에 쓰이는 일상적인 단어들이 감정을 정확하게 찝어서 말해주는 것 같고요.
윤 저는 노래를 만들 때 가사가 우선이거든요. 요즘은 더 그런 거 같아요. 왜냐하면 좋은 곡을 쓸 수 있는 뮤지션은 많기 때문에 곡은 받을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해서 만들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는 그게 아니니까. 저는 할 얘기가 없었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작업 못 했을 거예요. 다행히 살아가면서 할 얘기가 생기니까 계속 할 수 있는 거죠.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걸 음악으로 해보려고 했어요.”
윤 작년에 준일 씨가 발매한 싱글은 완전히 힘을 뺀 느낌이 나서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이뤄진 걸까요?
정 예전에는 음악적으로 이것저것 많이 욕심을 냈었는데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방식으로 음악을 만드는 게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몇 년 동안은 제대로 음악을 만들지도 않았어요. 심지어 공연에서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말한 적도 있었어요. 제가 지금 솔직히 가사 생각도 안하고 노래하고 있다고,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하면서 노래 부르고 있다고요.
윤 솔직했네요.
정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모든 사람을 속이는 거 같고.
윤 뭔지 알아요. 나도 그랬어요. 사람들 앞에서 기교를 부리고 수를 쓰는 게 참 부대끼더라고요.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요. 오래 활동한 뮤지션들한테는 그런 상태가 와요.
정 그래서 작년에는 그동안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었던 걸 음악으로 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윤 생각해보면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는 어떻게든 대중의 호응을 얻고 싶어서 갖은 수를 다 쓰거든요. 말은 안 해도 다들 뜨고 싶어하죠. 그리고 운이 좋으면 사랑을 받기도 해요. 그런데 그게 자기 능력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시기가 와요. 사실은 젊음이 주는 에너지인데. 어릴 때 만든 음악은 많이 서툴고 후지기도 한데, 그 에너지가 결점을 다 가려주는 거든요. 하지만 그런 시기는 잠깐이고 이제 진짜 내 얘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와요. 뜰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진짜 내 얘기를 음악에 담아야 하는 시기. 그런데 그런 음악은 대중 전체에게 가닿지는 않거든요. 진짜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들어주죠. 가수 윤종신이 이제는 지겹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교감하고 싶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남는 거예요. 뮤지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고요.
정 그런 것 같아요.
윤 최근에 낸 싱글 ‘첫사랑(feat. SOLE)’은 아예 객원 가수 초빙했어요. 이런 방식의 작업은 처음인 것 같은데?
정 요즘 젊은 인디 뮤지션들이 좋더라고요. ‘세이수미’, ‘김뜻돌’ 이런 친구들이요. 함께 작업하고 싶은 친구들에게 먼저 디엠으로 곡도 의뢰하고 가사도 부탁하고 그래요. ‘SOLE’도 1년 전부터 음악을 좋아하다가 이번에 회사를 통해서 참여를 제안했어요.
윤 직접 부르기 어려운 이야기는 이렇게 남의 목소리 빌려서 작업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저는 이게 실연자에서 작가로 자리잡는 과정 같아요. 저는 싱어들한테도 작가가 되라고 얘기하거든요. 노래만 부르는 사람도 자기 이야기를 입혀야 오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불쌍해보일까 생각하면서 불렀어요.”
윤 요즘은 어떤 이야기에 관심이 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정 예전에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요. 그런데 요즘은 정반대예요. 다 아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윤 어렸을 때는 그렇죠. 특이하고 싶고 반대로 가고 싶고.
정 맞아요. 지금은 뻔하고 다 아는 얘기를 잘 하고 싶어요. 그런 걸 찾아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윤 일부러 보편으로 간다기보다는 대중과 나의 접점을 찾는 거죠.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예요.
정 예전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컸는데, 지금은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큰 거 같아요.
윤 자,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요. 정준일의 ‘잘했어요’는 어떤 노래일까요?
정 음,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불쌍해보일까 생각하면서 불렀어요.(웃음) 가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정말 불쌍하잖아요.
윤 제 노래 중에서도 찌질미 극강인 곡이죠. 개인적으로 이곡의 화자가 ‘좋니’의 화자보다 더 찌질하다고 생각해요.
정 맞아요. 만약에 주변에 아는 동생이 이별을 하고 이런 가사 속 화자 같은 얘기를 한다면 정신 차리라고 할 것 같아요.
윤 제 생각에 정준일 버전의 ‘잘했어요’는 우아한 것 같아요. 제가 부른 게 사실적이라면 준일 씨가 부른 건 기품이 있죠. 사실 준일 씨가 이 곡을 부른다고 했을 때 좋았어요. 왜냐하면 이 곡은 지금의 저와는 많이 멀어진 감정을 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 노래는 정준일의 노래이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리페어 버전이 널리 퍼져서 많은 분들에게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