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5분 남았어!”
언니의 목소리가 높았다. 소윤은 젖은 몸의 물기를 닦아내며 알았어, 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매년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되는 순간이 반복되는데, 그게 저렇게 흥분할 일인가 싶었다. 언어로 규정된 시간만 어제와 오늘로 구획될 뿐, 시간의 흐름은 그렇게 분절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4분!”
소윤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거실로 나왔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캔맥주와 입을 벌린 몇 개의 과자봉지가 아무렇게 놓여 있었다. 언니는 음식 사진을 찍는 걸 세상에서 제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거 자랑해서 뭐할 건데? 라는 되물음에 소윤도 사실 명확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근데 정수 안 만나?”
“올해는 부모님 집에서 지내겠대.”
“싸웠니?”
“아니.”
싸울 일이랄 게 없었다. 주중에 한 번 정도 만나 저녁을 먹은 후 자정이 되기 전에 헤어졌고, 주말에는 함께 밤을 보냈다. 때로 근교로 드라이브를 하고, 때때로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잡아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취향이 남다르지 않은 성인 남녀의 연애라는 것은 평이하고 온화했다.
“권태기? 하긴 5년이면 재미없을 때도 되었네.”
“그런 건가? 5년이라는 시간은 그래도 되는 건가?”
평이하고 온화한 연애가 아니라 지루하고 심심한 만남이었던 걸까. 삼십 대 초반에 만나 연애만 5년이었다. 정수는 농담으로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소윤 역시 굳이 결혼이라는 절차를 겪고 싶지 않았다. 포기나 체념이 아닌 현실적인 타협이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만큼 바보 같은 말이 없다고 누누이 말해온 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했다. 새해가 되면 마흔 살이 되는 언니는 결혼 후 넉 달 만에 이혼을 했다. 언니 나이 스물다섯 살, 첫사랑과의 결혼이었다.
소윤은 과자를 집어 먹으며 언니가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휑한 밤거리에 서 있는 리포터의 목소리가 언니만큼이나 고조되어 있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커다란 숫자가 보였다. 11시 57분이었다.

3분 남았어요.
소윤은 정수가 아니라 승현을 떠올렸다. 정수와 함께 있던 한 해의 마지막 밤에도, 언니와 맞이하는 새해도, 친구들과 어울려 맞이했던 31일의 마지막 순간에도 소윤은 승현을 생각했다. 기억이란 잊고 싶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십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는데. 겨우 세 계절을 함께 보낸 사람인데, 승현에 대한 기억은 무턱대고 찾아오곤 했다. 승현은 다정하게 말했다.
나와 5분만 통화해요. 같이 새해를 맞이하고 싶어요.
소윤은 그 말이 승현의 고백인 줄 알았다. 소윤은 드디어 승현의 마음에 자기가 담기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생각했다. 검은 밤하늘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막 새해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윤은 옥상에서 승현은 베란다 창문 앞에서 똑같은 불꽃을 보며 통화를 이어갔다.
처음 만난 날, 헤어지기 직전의 승현은 소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헤어진 연인에 대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소윤을 소개받은 것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사귈 수는 없겠다는 말이 이어졌다. 소윤은 얼굴이 붉히며 사과하는 승현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럼 그 여자를 잊을 때까지만 나와 만나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어떻게 처음 만난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무엇 때문에 승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까지 기억나진 않았다. 기억은 마음대로 왜곡되고 삭제되고 섞이기 마련이니 사실 어디까지 진짜 기억인지도 이제는 모를 일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불꽃놀이를 보며 새해를 맞이한 승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 겨울밤이 얼마나 추웠는지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그해 봄, 승현은 결국 그 여자에게 돌아갔다.

전화벨이 울린 건 11시 59분이었다. 정수였다.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소윤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나 첫눈 같은 사랑 하나씩은 품고 살지 않을까. 정수에게라도 그런 사랑이 없었을 리 없다.
“뭐해. 전화 안 받고.”
언니는 막 뚜껑을 딴 캔맥주에서 넘쳐흐르는 거품을 후루룩- 소리내어 마신 뒤에 소윤에게 건넸다. 소윤은 한 손에 전화기를, 다른 한 손에 캔맥주를 들고 우두커니 선 채로 12시를 맞이했다. 작년이 아니라 올해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 되는 순간이었다. 통화를 하면서 12시를 공유하는 새해맞이는 한 번이면 족했다. 그 순간 소윤은 정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을 속여온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느새 전화벨은 끊기고 리포트 목소리만 거실에 울려댔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