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네>(2020)

포스터 한 장으로도 이미 매혹되는 영화가 있다. 최근에는 <운디네>가 그랬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뒤를 돌아보는 여자의 눈. 곧 폭풍 같은 감정의 격랑이 일어날 듯 보이는 그 눈을 마주치자마자 마음에는 깊은 여운이 남았다. 어떤 상황인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여자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방대한 풍경이 아니라 특정 인물일 것만은 직감했다. 몹시도 사랑하거나 아니면 처절하게 미워하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런 대상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영화를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장면이었다. 운디네(파울라 베어)는 연인 크리스토프(프란츠 고로스키)의 품에 안겨 베를린의 어느 다리를 건너는 중이다. 맞은편에서는 다른 커플이 걸어온다. 운디네는 상대 남자가 전 연인 요하네스(제이콥 마쉔즈)임을 알아본다. 그도 마찬가지로 운디네를 돌아본다. 요하네스는 운디네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 사람이다. 그때 운디네는 이렇게 얘기했었다. “네가 나를 떠나면 난 너를 죽여야 해. 알잖아.”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은 헤어진 연인의 짧은 시선의 교환이 있는 이 한 장면에 미련과 갈망, 불안의 전조, 운명의 직감 같은 것들을 구성해 넣는다. 장면의 밀도는 불안하게 부풀어 오른다.

이전에도 계속해서 운디네의 주변에서는 파열의 이미지들이 반복됐던 터다. 견고하다 믿었던 사랑이, 물이 가득한 수조가, 산업 잠수부인 크리스토프를 상징하는 피규어의 다리가 부서지고 깨졌다. 운디네는 본래 유럽에서 전해오는 설화 속 주인공이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도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것이다. 정령(精靈)인 운디네는 인간과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상대의 배신이 있을 경우 그를 죽이고 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곧 정령의 저주가 시작될 시간인 걸까. 운디네는 결국 물속에 잠겨야 하는 운명인가.

<운디네>(2020)

<운디네>는 비극을 담보로 하는 이 사랑의 주인공을 현대의 시공간으로 옮겨온 작품이다. 운디네가 도시 역사가이자 박물관 가이드로 살아가고 있는 베를린은 영화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습지를 메워 건설한 도시인 베를린은 장벽이 무너진 이후 재개발 계획에 의해 역사를 발밑에 묻었고, 끝없는 공사로 몸살을 앓는 공간이다. 과거의 흔적을 부지런히 지워내느라 바쁜 이곳에 현실이 아닌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운디네와 물속에 가라앉은 산업화의 잔재들을 건져내는 크리스토프는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들이다. 두 사람은 현실의 공간인 육지와 신화적 공간인 물속을 오가며 사랑의 운명과 도시가 잃어버린 전설을 이야기한다.

설화의 세계는 계속해서 운디네를 붙잡는다. 물속으로, 비극적인 사랑의 운명 안으로 그를 밀어 넣는다. 상대방의 욕망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야 하는 존재로 끌어내리려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운디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맞서는 투사다. 그는 순응하는 대신 선택한다. 자신을 떠난 연인에 대한 복수도, 새로운 인연을 자신의 곁에만 붙잡아두는 것도 거부한다. 운디네는 이미 사랑 앞에서 자유롭고 초월적인 존재다. 이 근사한 변주를 통해 영화는 역사와 마술적 설화의 신비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영화의 끝에 다다라 기억을 되감다가 첫 장면에 이르렀다. 운디네는 헤어지자고 말하는 요하네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이다. 일방적으로 사랑의 끝을 말하는 상대방의 무성의한 태도 앞에, 운디네는 끓어오르는 슬픔과 모멸감을 조용히 삼키고 있다. 분명 울고 있지만 눈물은 부수적인 장치일 뿐이다. “네가 나를 떠나면 난 너를 죽여야 해. 알잖아.” 그것이 극단적인 감정적 호소가 아닌 온몸으로 운명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영화를 다 본 뒤에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운디네>(2020)
Undine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
주연 폴라 비어, 프란츠 로고스
시놉시스
도시개발 전문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관광 가이드 운디네는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던 요하네스에게 실연당한다. 절망한 그녀 앞에 산업 잠수사인 크리스토프가 나타나고 그녀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