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정>(2018)

혼밥, 간편식의 시대다. 바쁘고 삭막하게 돌아가는 도시의 시간 안에서 요리의 과정은 종종 번거로운 것 취급당한다. 타인과 함께 하는 식사도 마찬가지다. 언택트 시대의 밥상 풍경은 더하다. 요즘엔 식사가 나누는 기쁨보다는 고독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밥정>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도는 기분을 느낀 건 그래서다. 밥으로 쌓은 정. “밥 먹었어?”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한국 사람들 특유의 인사에 더해 외국어로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고유의 개념인 ‘정’이 붙은 단어. 이 따스한 언어에는 정확히 무엇을 향한 것인지 모를 그리움 역시 깃들어있다.

인연으로 만난 사람과 나누는 밥 한 그릇의 귀중함을 알고, 세상사에 깃든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며, 자연을 경외하고 이치를 받아들이려는 삶. <밥정>은 임지호 셰프의 그런 마음가짐이 곧 영화적 태도가 된 다큐다. 그의 삶은 수행자의 그것을 닮았다. 오죽하면 다큐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등장한 공간이 부엌이 아닌 눈보라 부는 설원이겠는가. 생명이 붙어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듯한 얼은 땅에서 임 셰프는 식재료로 쓸 풀을 채집해낸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전국을 떠돌며 잔디, 잡초, 이끼, 나뭇가지 등등 지천에 널린 것들을 재료 삼아 요리를 만드는 임셰프에게 세상은 ‘방랑식객’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누군가 보기에는 기행에 가까운 그의 레시피가 궁금한 사람에게 아마 <밥정>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다큐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요리 다큐’가 되지 않으려는 단단한 태도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차리는 과정보다는 그 상을 차리는 마음, 거기에 올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겠다는 다짐이 엿보인다.

<밥정>(2018)

<밥정>의 진짜 이야기는 임 셰프의 개인적 사연에서 비롯된다. 친어머니와 키워준 양어머니에 대한 아픈 사연을 간직한 그는 길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한다. 그 마음의 기저에는 어머니를 향한 해갈되지 않는 그리움이 자리한다. 어릴 때 집을 뛰쳐나와 식당을 전전하며 음식을 배웠던 임 셰프는 이곳이 혹시 생전 어머니가 온 곳이었을까, 어머니와 관계된 사람을 스쳤을까 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돈다. 그 과정에 만난 이들 중에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한 사람도 있다. 지리산에서 만나 10년 가까이 그가 길 위의 어머니로 모신 김순규 할머니다. 끝내 김 할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자, 임 셰프는 낳아주고 길러준 그리고 마음을 나눠준 세 명의 어머니를 위한 상을 준비한다.

그가 3일 밤낮 휘몰아치듯 108개의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분명 이 다큐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표현은 못내 피상적이다. 임 셰프의 모습에서는 종교와 철학과 그 외의 많은 것들을 뛰어넘는 기운이 감지된다. 그것은 세속적이지 않은 무언가이며, 여기엔 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10년 가까이 지척에서 그의 모습을 담아온 박혜령 감독도 그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임 셰프 역시 말이 없다. 낮과 밤이 뒤바뀌는 모습과 음식을 준비하는 분주한 소음만이 말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다. 번뇌와 고통과 소망과 치유의 과정. 이 가슴 절절한 사모곡의 풍경은 그 어떤 종교적 의식보다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오. 이 빚을 내 생애 다 어떻게 갚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임셰프와 동행하고, 그의 요리를 선사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밥 한 그릇의 힘은 세다. 그 온기는 너끈히 그 다음날을, 어쩌면 아무런 희망 없이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해낼 것이다. 애초에 임 셰프를 살게 한 것 역시 길에서 만난 이들이 건넨 미소와, 여행객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던 이들이 급하게 끓여내온 냉잇국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임지호라는 개인을 통과해 만난 <밥정>은 크게는 결국 인연과 정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우리가 자꾸만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밥정>(2018)
The Wandering Chef
감독
 박혜령
주연 임지호
시놉시스
잔디, 잡초, 이끼, 나뭇가지.. 자연을 재료 삼아 요리를 만드는 방랑식객 임지호 셰프.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에 대한 아픈 사연을 간직한 그는 길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음식을 대접한다. 지리산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를 길 위의 어머니로 10년간 모시지만, 끝끝내 찾아온 3번째 이별. 임지호 셰프는 낳아주신, 길러주신, 그리고 마음을 나눠주신 3명의 어머니를 위해 3일 동안 108접시의 음식을 장만한다. ‘밥’으로 ‘정’을 나누는 인생의 참맛, 더 늦기 전에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