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하기로 했다. 세계의 비극에 맞서는 짧고 순진한 위로를.
로맨스물도 사람을 얼얼하게 만들 수 있구나. <어트랙션>(2019)을 보고 난 뒤 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스톡홀름의 유서 깊은 놀이공원 그뢰나 룬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미오와 줄리엣> 풍의 로맨스는 좀처럼 은유를 모른다. 그뢰나 룬드를 운영하는 닐슨 가문의 장녀 닌니(프리다 구스타프슨)와, 바로 옆 라이벌 놀이공원 페어 그라운드를 운영하는 린드그렌 가문의 장남 욘(알빈 그렌홈)은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두 놀이공원의 오래 된 라이벌 구도와, 북유럽까지 밀고 올라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은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본디 애정이란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을 때 더 뜨겁게 타오르는 법. 영화는 온갖 VFX의 힘을 빌어 그렇게 가로막힌 두 청춘의 절박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화면에 새긴다.
상대 놀이공원의 비밀을 염탐하기 위해 파견된 각 가문의 첫째들이 하라는 정보탐색은 안 하고 서로를 향한 끌림만 확인하고 돌아온 날 밤, 처음으로 제 안에 닌니를 향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욘은 꿈 속에서 닌니를 만나 결투를 벌인다. 욘의 권총이 불발하는 동안 닌니의 권총에선 총알 대신 피처럼 붉은 장미꽃들이 발사되어 욘을 향해 날아든다. 닌니와 욘이 먼 발치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두 사람의 영혼은 문자 그대로 각자의 육신을 떠나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부둥켜안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상대를 탐닉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마음이, 비유나 상징이 아닌 직설로 화면 위에 새겨진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돌려 말하는 법도 모르는 이 어처구니없는 로맨스 영화를 보고 난 뒤, 난 어떤 영화와 짝을 지어주면 좋을지 몰라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전속력으로 달려와 부딪히는 영화의 뻔뻔함이 얼얼하다 못해 욱신거렸다.
<어트랙션>의 스웨덴 원제는 <Eld & lågor>다. 우리 말로 직역하면 <불과 화염> 쯤으로 옮길 수 있는 이 제목은 직설적인 영화와는 달리 사뭇 중의적이다. 그 불은 놀이공원을 집어삼킨 (실제 역사 속에선 1935년에 일어난) 화염일 수도 있고, 유럽인들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든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火)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태우고 무너뜨리고 앗아가는 불의 반대편에는, 화려하고 따뜻하게 매혹하는 불도 있다. 영화 중반,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던 닌니와 욘은 핀란드 고아들이 수용된 고아원 풀밭 앞에서 즉석 공연을 펼친다. 저마다의 방에서 잠을 청하려던 고아들이 창가로 몰려들고, 온 건물 창에 불이 들어온다. 닌니와 욘은 고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허공으로 불꽃을 뿜어 올린다. 나치와 싸우겠다며 고향을 떠나 온 닌니를 붙잡기 위해 달려온 욘은, 그 날의 공연을 상기시키며 닌니에게 말한다. “있잖아. 지금의 세계는 핀란드 고아원 같은 상황이야. 우리가 웃음을 줘야지. 모르겠어?” 죽음과 전쟁과 배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끝내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사랑과 웃음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어이없을 만큼 순진하고, 그래서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선뜻 믿고 싶어진다.
글쎄, 과연 사랑과 웃음만 가지고 미움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거제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탭댄스 영화 <스윙키즈>(2018)를 떠올린 건 그 때문이다. 공산포로들 사이에서 ‘인민영웅’으로 추앙받는 소년 로기수(도경수)는 사실 투철한 이념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다. 북쪽에서 태어난 탓에 인민군이 되었을 뿐, 미군 보급품을 훔쳐먹는 걸 ‘보급투쟁’이라 포장하고 미군들이 추는 춤을 보며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기수는 그저 춤이 좋은 소년에 불과하다. 백인들 투성이인 주한미군 안에서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잭슨(자레드 그라임스)의 지휘 하에 급조된 이념선전용 탭댄스 팀 ‘스윙키즈’에 들어간 기수는, 춤을 통해 이념과 언어를 넘어 소통하고 잠시나마 자유롭게 춤 출 수 있는 삶을 열망한다. 절친했던 친구 광국(이다윗)이 이념에 경도된 반제투사가 되어 반공포로들을 죽이고 다녀도, 덩치만 컸지 지능은 5살 수준인 형 기진(김동건)이 끝내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끌려와도, 도저히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나갈 가망이 보이지 않아도, 춤추는 순간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춤만으로 전쟁의 광기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고, 영화와 기수는 예정된 결말로 달려간다.
너무도 사랑하는 작품이지만 <스윙키즈>를 통으로 긍정할 수 없었던 건, 이 작품이 이념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갈등 없이 바로 ‘빌어먹을 이념 따위’라는 결론으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단 한번도 어떤 이념을 내면화해 본 적이 없기에, 이념을 버리는 데에도 별 내적 갈등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를 가로막는 건 오로지 외부적인 상황 – 자신이 지켜야 할 형 기진, 자신을 인민영웅으로 우러러보는 공산포로들의 시선,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기 십상인 거제 포로수용소의 분위기 – 일 뿐, 그는 이념을 두고 내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 사랑과 웃음으로 세계의 비극을 이길 수 있다는 <어트랙션>의 순진한 믿음만큼이나, 이념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채 ‘이념이 자유롭게 춤추고 싶었던 개인을 꺾었다’고 말하는 <스윙키즈>의 이분법 또한 순진해 보였다. 그 무렵 나는 영화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거대 담론의 ‘어떠한 경향’을 비웃는 것과 ‘거대 담론’ 자체를 비웃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고, 그 둘을 애써 구분하지 않는 강형철 감독의 의도적인 무심함은 <스윙키즈>에서도 반복된다. <스윙키즈>는 ‘이념에 따라 갈린 진영’과 ‘이념’ 그 자체를 혼용한 탓에, 이념 대결이 빚어낸 비극의 구도를 ‘소박하고 아름다운 개인의 자유’와 ‘폭력적인 거대 담론’의 대결구도로 축약해버린다. 개인 좋아, 이념 나빠.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가능성 또한 같은 수준으로 축소됐다.”
하지만, <어트랙션>을 본 뒤 나는 내가 <스윙키즈>를 오독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탭댄스가 아니었어도, 기수와 판례(박혜수), 병삼(오정세)과 샤오팡(김민호)은 아마 높은 확률로 한국전쟁을 살아서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연일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생지옥이었고, 전쟁은 그에 휘말린 이들에게 너그럽지 않았으며, 한반도 남과 북의 정부는 모두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난 뒤에도 국민들에게 준전시체제를 강요하며 체제에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해 볼 기회도 없이 ‘자본주의 반동새끼’로 몰려서 죽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빨갱이 새끼’로 몰려서 죽었다.
그리고 그 생지옥 속에서 그나마 그들을 숨쉬게 해주었던 건 탭댄스였을 것이다. 채 내면화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고 총부리를 들이밀며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이념 대결의 폭력을, 기수와 판례, 병삼, 샤오팡, 잭슨은 춤을 추며 하늘을 향해 육신을 던지는 것으로 견뎌냈다. 마치 부모 세대의 갈등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새 롤러코스터를 설계하면서 행복을 이야기하던 닌니와 욘처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순진하기 짝이 없는 현실도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구원이란 게 꼭 그렇게 복잡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롤러코스터가 한 바퀴 돌아가는 시간만큼 짧은 희열이라도, 탭댄스 넘버 한 곡만큼 짧은 전율이라도, 그것이 사람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준다면 안 될 건 또 뭔가. 그렇게 난 <어트랙션>을 빌미로 <스윙키즈>를, 짧고 나이브한 위로를, 손에서 금방이라도 휘발되고 마는 찰나의 구원을 긍정하기로 했다.
감독 강형철
주연 도경수, 자레드 그라임스, 박혜수, 오정세
시놉시스
1951년 한국전쟁, 최대 규모의 거제 포로수용소. 새로 부임해 온 소장은 수용소의 대외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전쟁 포로들로 댄스단을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수용소 내 최고 트러블메이커 ‘로기수’(도경수), 무려 4개 국어가 가능한 무허가 통역사 ‘양판래’(박혜수), 잃어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유명해져야 하는 사랑꾼 ‘강병삼’(오정세), 반전 댄스실력 갖춘 영양실조 춤꾼 ‘샤오팡’(김민호), 그리고 이들의 리더, 전직 브로드웨이 탭댄서 ‘잭슨’(자레드 그라임스)까지 우여곡절 끝에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의 이름은 ‘스윙키즈’!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춤을 추게 된 그들에게 첫 데뷔 무대가 다가오지만, 국적, 언어, 이념, 춤 실력, 모든 것이 다른 오합지졸 댄스단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