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각자의 박자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견디지 못하는 절망들이 있습니다. 내 의지가 환경에 의해 지배된다거나 원하지 않는 일에 거절당하거나 혹은 나만 좋아하는 무엇을 평생 나만 좋아하게 되어버린 일들입니다. 이 모두는 고달프게도 나의 사소한 자존감이 자신을 스스로 크게 좌절시키는 예시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굳이 환경을 전복하고 타자에게 강요되는 일들로 채워지는 것만큼 피로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이 노래로 자주 위안을 받아왔습니다.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그저 여러 번 듣고 더 듣는 것입니다. 쿵쿵하며 떨어지는 날벼락 같은 순간들에서도 다시 끌어올려 주는 마음들이 여기저기서 반복됩니다. 주변이 서서히 축축해지며 울먹여도 가파른 부암동 언덕은 어차피 끝까지 올라가야지만 우리 집이 나옵니다. 모든 게 다 내 맘대로 되진 않을 거라고 합니다. 나의 의지대로 세상만사가 흐르면 퍽 좋으려나. 그렇게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평이할까. 지배자가 없는 아나키스트로 굳이 내버려 둔다면 항상 선구자이면서 도태된 자신에게 실망할 테지 하며 쓸데없는 고민을 시작할 때쯤, 노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합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듣다 보면 이 노래가 주는 지속적인 강요와 위안이 나로 하여금 모든 환경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렇게 세상의 박자감은 통일되어 엠씨스퀘어처럼 나만의 백색소음이 됩니다.
어차피 모두는 각자의 박자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그 절망이라는 것도 그 다름이라는 템포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마음의 변태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라는 이 2인칭의 시선은 우리 모두를 존재하게 합니다. 내가 너를 가리키고 너는 나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시간을 걸어야 할 수밖에 없는 진공에 갇히게 됩니다. 천상 서로의 박자감에 맞춰 지내는 통에 1인칭은 무색해집니다.
그 진공 속에서 나 편하게 하자고 듣는 이 노래는 사실 그냥 다른 이에게 가장 추천해 주고 싶은 노래입니다. 어차피 너와 나 그리고 그와 그들의 모두 다른 박자감을 이해하며 공존해야 한다면 장기적으로 나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듣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곤 하지만 사실 한 번만 들으면 노동이든 망상이든 끊겨버리는 나의 쥐꼬리만 한 인내를 포장하는 데 쓰임이 용이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 노래를 활용하고 있나 봅니다.
장황하게 나의 ‘당신의 노래’를 설명하다 보니 부끄러워서 또 다른 절망의 카테고리가 생길 것 같습니다만, 그저 모두가 모과이의 이 노래를 들을 땐 각자가 2인칭이 아닌 재귀대명사로서의 당신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이 정도 마이너를 걸었으면 도착할 때가 다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