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2019)

모든 계절의 낮과 밤 풍경이 다르지만, 여름밤만큼은 좀 더 특별한 감흥을 느낀다. 시끌벅적하고 뜨거운 낮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찾아드는 소리와 모양은 근사하다. 밤이 급작스레 찾아오는 듯한 다른 계절과 달리 여름은 시간에 풍경이 서서히 스미는 듯해서일까? 지열은 적당히 남아있고, 공기는 끈적하긴 해도 달곰하다. 사계절 중 유독 짧은 어둠의 길이는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아침이 오기 전에 왠지 무언가 다른,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밤. 그 느낌은 늘 여름에만 유효했다.

계절의 감각을 이해하면서는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말에서 환상성과 슬픔을 동시에 읽었다. 여름밤은 왠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임이 다른 계절에 비해 더 선명하게 자각되곤 했다.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수박, 대나무 돗자리, 맵고 쌔한 모기향 냄새로 남은 유년시절의 여름밤은 떠올리면 늘 그리웠다. 내 가족이 겪었던 상황들과는 상관없이 아련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의 기억. 여름밤만의 마법이었다.

신예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을 보면서 그 감각들이 하나하나 깨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는 얼렁뚱땅 할아버지의 집에 모여 살게 된 한 가족의 시간을 그린다. 아빠(양홍주)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온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 남매, 뒤이어 고모(박현영)까지 합세하며 다섯 식구가 한집에 모여 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화는 반복되는 이 가족의 일상을 통해 이를 지켜보는 이들 저마다의 시간을 소환한다.

<남매의 여름밤>(2019)

‘큰 남매’ 아빠와 고모는 결혼으로 집을 떠났지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풀리지 않은 것 같다. 옥주 아빠는 사업 실패로 할아버지네 임시 둥지를 튼 것이고, 고모는 말은 않지만 이혼할 요량으로 집을 나온 듯 보인다. ‘작은 남매’ 옥주와 동주는 사춘기 누나와 철부지 동생이 으레 그렇듯 사사건건 신경전이다. 옥주는 하지 말래도 엄마와 연락해 만나는 동생 동주가 밉고, 절대 먼저 연락 않는 남자친구의 미온적 태도도 서운하다. 오락가락하는 할아버지의 건강도 가족들의 근심이다.

각자 아무와도 공유 못할 근심 많은 하루를 보내고, 함께 웃기도 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먹을 것을 두고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먹는 일상의 풍경들. <남매의 여름밤>에 담긴 전부다. 이야기를 지탱하는 건 사건이 아닌 인물의 감정과 그들을 둘러싼 정서다. 별일 없는 가운데 별일이 일어나고, 누군가 부재할 때면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던 가족의 시간들. 영화는 그 소소한 하루하루 가운데 예쁘게 반짝이고 또 서럽게 얼룩지는 삶의 모습들을 건져 올린다. 동시에 할아버지를 통해 인간에게 시간은 유한하며, 우리 모두가 느리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경험시킨다. 자극으로 가득한 세상 안에서 <남매의 여름밤>이 주는 이 잔잔하고도 소박한 공감은 귀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겠지만, 옥주와 동주는 가족 모두를 넉넉히 품어주는 2층 양옥집 안에서 더 단단하게 여물고 성장할 것이다. 인생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했을 아빠와 고모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매일같이 누군가와 시간과 삶을 공유한다는 건, 땅을 딛고 선 다리에 힘을 더해준다.

나는 이 영화에서 안온한 연결의 감각을 느꼈다. 나의 인생을 수놓았던 무수한 여름밤과 당신의 여름밤, 또 이름 모를 누군가들의 수많은 시간들. 그 모든 것이 때론 다르고, 때론 비슷한 모양으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이 따스한 감각이 당신의 일상에도 넉넉한 온기를 불어넣어 줄 것임을.

<남매의 여름밤>(2019)
Moving On 
감독
 윤단비
주연 양흥주, 박현영, 최정운, 박승준, 김상동
시놉시스
방학 동안,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 남매 옥주와 동주. 그렇게 오래된 2층 양옥집에서의 여름이 시작되고  한동안 못 만났던 고모까지 합세하면서 기억에 남을 온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