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구왕>(2013)

“가만 보면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인데, 행운을 찾느라 눈앞의 행복을 놓치고 있다’ 운운하는 사람치고 정작 세잎클로버를 뽑아서 책갈피로 말려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연인과 함께 풀밭을 산책하면서 나눌 수 있는 대화 중 클로버 꽃말 이야기만큼 뻔한 토픽이 또 있을까. 어느 날 저녁, 한강변을 산책하다가 수풀이 무성하게 올라온 양화대교 부근을 지날 무렵 나는 뻔한 줄 알면서도 그 오래 된 이야기를 꺼냈다. 나보다는 언제나 더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나의 연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그래서 언제나 다섯잎클로버를 찾았지.”
“다섯잎클로버? 그건 꽃말이 뭔데?”
“금전운.”

돈이 있다고 무조건 행복해지지는 않지만, 돈이 없으면 거의 100%의 확률로 불행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내 연인의 판단이 더 정확할 것이다. 뻔하게 “말로만 세잎클로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세잎클로버를 잡을 줄 알아야 하는데” 운운하려던 나 또한, 내심 다섯잎클로버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하고 연인의 현명함에 조용히 감탄했다. 그렇지. 이 땅에서 돈 없이 뭘 할 수 있겠어.

기태(이동휘)가 찾아 헤맸던 클로버의 이파리 개수는 몇 개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세 개는 아니었으리라. 자세한 사정이 나오는 건 아니어도, 기태가 법의 정교한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이나 정의 구현을 향한 열망을 지닌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사법고시에 줄창 매달렸던 이유도 아마 그런 거였겠지. 처음엔 행운을 바랐고, 그 다음엔 오기가 생겼고, 나중엔 자존심이 걸렸을 테다. 우리는 대부분 소박한 행복을 원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일삼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우리는 대체로 네잎이나 다섯잎클로버를 찾아 평생을 헤맨다. 소박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선 행운과 금전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서울에서 네잎클로버도 다섯잎클로버도 찾는 걸 실패하고 지쳐버린 기태지만, 적당히 고향 내려와서 국도극장 매점 일 하면서 살라는 엄마(신신애)의 말은 듣기 싫었을 것이다. 소소한 행복도 자신이 선택해서 누릴 때나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지, 다른 모든 선택지에 실패해서 등 떠밀리듯 선택하게 되면 제대로 누릴 수 없는 법이니까. 해가 저물 때까지 네잎클로버를 찾아 헤매다 실패해 꿩 대신 닭으로 적당히 세잎클로버나 몇 개 뽑아간다고 생각해보라. 세잎클로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사하게 여길 수 있을지.

그래서 기태의 행복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도달한다. 형 희태(김서하)가 뒷일을 미리 마무리 해뒀으니 영은(이상희)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도 되련만, 기태는 영화 말미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 서울로 돌아가지 않기를 선택한다. 벌교로 돌아온 건 자기 의지가 아니었어도, 남기로 마음을 먹은 건 기태 자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잠시 느리게 가기로, 반짝이는 서울의 화려함과 치열함에서 한발 정도는 멀리 서있기로 선택한 뒤에야 비로소 기태는 웃는다. 마지못해 내린 선택이었을 때는 웃을 수 없었던 것도, 시간을 두고 마음을 준 뒤에 제 의지를 담아 재차 내린 선택이 된 후에는 웃을 수 있다.

<족구왕>(2013)

<국도극장>의 느릿하고 조용한 톤과는 사뭇 차이가 있지만, 나는 문득 <족구왕>을 떠올렸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머리에 새치가 돋아나기 시작한 형국(박호산)은, 막 전역해서 원없이 족구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다는 만섭(안재홍)에게 잘라 말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해. 제대했다고 들떠서 여자 만날 생각 하지 말고, 군바리 티 내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강의실 기숙사 도서관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해.” 형국도 한때는 캠퍼스에서 아무 근심 없이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족구를 하던 청춘이었지만, 멀리 있는 미래를 준비하려다 보니 족구 같은 건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만섭이라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 족구에만 매달렸을까? 토익은 본 적도 없고 학점은 평점 2.1인데다가 학자금대출도 못 갚아 등록이 취소되는 상황인데, 정말 그 상황에서 아무 생각도 없었을까? 아닐 것이다. 만섭이 영어 말하기 시간에 발표했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그도 일평생 네잎클로버와 다섯잎클로버를 찾아 헤매다가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지쳐버린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온전히 즐거울 일만 찾아서 족구를 향해 달려갔던 거겠지. 주변에 만발한 세잎클로버를 눈앞에 두고도 놓쳤다는 회한 때문에.

<족구왕>의 결말을 두고 웃기지만 서글프다고 한 이들이 많다. 아마도 여운을 남긴 채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린 만섭의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겠지. 안나(황승언)도 강민(정우식)도 창호(강봉성)도 미래(황미영)도 모두 누군가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누리는 동안, 오로지 만섭만이 낡은 족구공 하나를 옆에 앉혀놓고 저 멀리로 떠나니까. 하지만 정말 그 순간이 서글픈 걸까? 혼자 국도극장 앞에서 민들레와 함께 셀카를 찍으려 엉거주춤 쪼그려 앉은 기태가 행복했던 것처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을 원없이 한 만섭은 곁에 누가 없더라도 행복했을 것이다. 세잎클로버의 아름다움을 즐기러 들판에 나간 이에게 공치는 하루 같은 건 없으니까.

물론 기태도 우리도 만섭처럼 살 순 없을 것이다.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도, 현실이 돈과 조건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겠지. 나와 내 연인이 그렇듯, 말로는 세잎클로버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네잎이나 다섯잎클로버를 찾아 헤매는 날들을 겪을 것이다. 기태라고 언제까지 국도극장 영업부 부장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의 결정이 어느 쪽이든 아마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한번 눈 앞의 세잎클로버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겐 그 어떤 날도 공치는 하루가 아니니까. 네잎클로버나 다섯잎클로버를 찾는데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라도, 지천에 널린 세잎클로버를 보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테니까.

<족구왕>(2013)
감독
 우문기
주연 안재홍, 황승언, 정우식
시놉시스
이름: 홍만섭, 나이: 24세. 신분: 식품영양학과 복학생. 학점: 2.1, 토익 점수: 받아본 적 없음. 스타일: 여자가 싫어하는 스타일. 여자 친구: 있어본 적 없음. 다시 읽어봐도 답 안 나오는 스펙의 주인공 만섭. 지금 당장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어도 모자랄 판에 캠퍼스 퀸 안나에게 첫눈에 반하질 않나, 총장과의 대화 시간에 족구장을 만들어달라고 하질 않나 아주 그냥 ‘족구 하는 소리’만 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퀸카 안나가 요즘 남자애들 같지 않은 만섭의 천연기념물급 매력에 관심을 보이고, 만섭은 급기야 안나의 ‘썸남’인 ‘전직 국대 축구선수’인 강민을 족구 한판으로 무릎 꿇리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만섭은 ‘그저 그런 복학생’에서 순식간에 캠퍼스의 ‘슈퍼 복학생 히어로’가 되고, 취업준비장 같이 지루하던 캠퍼스는 족구 열풍에 휩싸인다.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 속에서 드디어 시작된 캠퍼스 족구대회! 누가 봐도 허술해 보이는 외인구단 만섭 팀은 복수심에 불타는 강민이 속한 최강 해병대팀을 이기고 사랑과 족구 모두를 쟁취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