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산주가 유리병을 돌려달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산주, 내 여동생이 맞았다. 이번에는 그랬다. 그 애가 라믹탈 칠십 알을 토해내고 살아난 날로부터 보름 뒤의 일이다.
처음에 나는 산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말이 빚어지는지 찢어지는지 모르게 그 애의 입안에서 밀려 나오고 있어서였다. 산주의 발음들은 내가 어떤 기분에 이르기 직전에야 분명해졌고, 결정적으로 나를 화나게 하지는 않았다.
“유리병?”
“베지밀병.”
겨울, 편의점에서 따뜻하게 해 파는 두유. 산주는 어느 추운 날 귀가하다가 편의점에 들렀고, 온장고에 든 베지밀을 샀다. 집으로 걸어가며 귀하고 달게 전부 마셨다. 빈 유리병을 협탁에 올려두었다. 왜인지 치우지 않고 그대로 삼 년 정도 두었다. 모르는 사이 사라져 있었다. 도둑이 든 게 아니라면 내가 가져간 것이었다.
그걸 왜? 나는 유리병을 떠올리려 애썼다. 적어도 계절에 한 번씩은 들러보았으니 삼 년 동안 올려두었다면 본 기억이 나야 했다. 협탁에는 이따금 다이어리가 엎어져 있었다. 반 토막 난 가름끈이 밖으로 흘러나온 채였다. 나머지 반은 고양이 배 속에 들어 있을 터였다. 다 마신 두유병이 있었던가.
“중요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은데……”
“중요하지 않아. 그래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도 않은 걸 언니가 가져간 거야.”
“그렇구나.”
“병을 씻어서 햇볕에 말려서 거기에 꽃을 꽂아둘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했을 것 같니?”
“아니.”
그날 오후 나는 베지밀B를 샀다. 달았다고 했지. 날은 부쩍 더웠으나 따뜻한 걸로 샀다. 아무 편의점에나 들어가 샀고, 마셨고,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물로 헹궜다.
산주는 덤덤했다. 병을 꺼내 보여주는데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협탁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밀어내 자리를 마련하기만 했다. 유리병이 진짜이든 아니든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변덕이 아니었다.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고마워. 이제 가도 돼.”
나는 알겠다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그 뒤로 좀 미적거렸고, 내가 그곳에 있어도 될 만한 구실을 찾았다. 가장 만만한 것으로 집안일을 했다. 현관에 쭈그려 앉아 신발을 정리했다. 가려는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름 없는 고양이가 나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산주는 책상 앞에 앉은 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목줄을 채우고 고양이를 산책시켰다. 몇 발짝 가지 못했다. 그 고양이는 자동차 바퀴에만 관심이 많았다.
돌아왔을 때 산주는 아까 모습 그대로였다. 빛의 방향만 달라졌다. 산호색 빛이 유리병에 부딪쳐 굴절했다. 저물녘이었다. 두 폭짜리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그 애의 윤곽을 선명하게 했고, 윤곽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의문에 붙이게 했다. 그 애의 뒤통수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조절제 칠십 알을 삼킨 날 산주는 이미 산주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되찾는다 한들 잃어버리지 않은 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애가 스스로를 소중히 했든 소중히 하지 않았든.
그다음 일들은 오로지 시간의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산주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기보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리라는 것을 아는 쪽이었다. 그 애에게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오후 여섯시의 빛깔처럼.
그날, 이름 없는 고양이를 산책시켰던 날, 나는 자동차 밑을 탐험하려는 고양이를 집어 들고 길목을 달리다시피 건넜었다. 맞은편 꽃집에 들어갔다. 마음이 먼저 도착해 숨을 고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손아귀 안에서 털북숭이의 따뜻하고 빠른 팔딱거림이 느껴졌다. 나는 혼자 있어도 초라하지 않을 정도로 송이가 크고, 색이 선명하고, 그러나 완전히 피지는 않은, 아직 할 일이 더 남은, 그곳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샀다. 그 애가 상상했을 꽃을. 돌아와 유리병에 꽂았다. 꽃은 알맞게 들어갔다. 아주 약간의 기척만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보지 않는 척하지만 산주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꽃은 예뻤다. 바로 그 꽃이었다. 그리고 그 애는 왼쪽 볼에 가로로 된 보조개를 새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