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남은 비극적 아름다움, 그리고 장국영
소년 데이는 버림받아 경극단에 왔다. 육손이로 태어나 배우가 되지 못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칼을 내려쳐 소년의 손가락 하나를 자른 뒤 매정하게 떠나버렸다. 그날로 경극단은 소년의 유일한 거처가 됐다. 사내로 태어났으나 무대에서 여자가 되도록 훈련하는 과정은 가혹하다. 그러나 운명은 소년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고된 훈련과 매질을 견디다 못해 극단에서 도망친 소년이 다시 돌아온 건, 우연히 극장에서 패왕과 우희의 연기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경극 ‘패왕별희’는 초나라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의 이야기다. 한나라 유방의 계략에 빠져 초나라를 빼앗기고 시름에 잠긴 패왕의 곁에는 우희만이 남는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패왕을 바라보던 우희는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이 비극적 정서로 꽃 핀 무대 위의 예술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결연함 다짐. 그 다짐은 소년의 삶을 영영 바꿔놓는다.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는 동명 경극을 중심에 놓고 1920년 군벌시대부터 문화혁명 이후의 1977년까지 굵직한 중국 근대사를 관통한다. 경극단에서 만나 우희로 자란 데이(장국영)와 패왕으로 자란 샬루(장풍의), 이후 샬루의 부인이 되는 홍등가 출신의 여인 주샨(공리). 세 사람의 인생은 ‘패왕별희’라는 경극과 시시각각 바뀌는 사회 이념의 광풍 아래에서 휘몰아친다. 이번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하 <패왕별희>)은 1993년 작품에서 15분 분량을 늘린 버전이다. 영화는 과거의 감동 그대로, 어쩌면 그 이상을 관객에게 펼쳐 보인다. 이제 더는 이념의 시대가 아닌 세상에 도착한 과거 시제의 이야기는 인물들의 삶이 지닌 비극성을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특히 데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인물이다. 무대 위 우희가 되도록 평생을 훈련하며 스스로를 갈고닦다가,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역할에 잠식당한 사람이 바로 데이다. 우희가 패왕을 바라보듯 한 평생 샬루를 바라보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샬루의 외면과 “경극에 미쳤다”라는 비아냥뿐이다. 상처받은 영혼으로서, 끝내 꼿꼿한 기품을 지키고자 한 예술가로서,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없어 고독한 인간으로서 데이가 지닌 사연들은 보는 이의 마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세상이 너무 빨리 잃은 별인 장국영은 작품에서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다. <패왕별희> 안에서 그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가히 초월적이다. 청초함이 돋보이는 선 고운 얼굴에는 데이의 비극적 삶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내려앉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역 없이 경극을 소화한 장국영의 노력 역시 작품의 완성도를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경극에 인생을 쏟아부은 우희처럼,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다시피 한 장국영의 모든 것이 <패왕별희>를 빛내고 있다.
매 장면 잊을 수 없는 잔상으로 남는 영화이지만, 데이가 더는 자신이 우희를 연기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시퀀스는 압도적이다. 무대 뒤, 분장을 마치고 대기 중이던 데이는 자신을 몰아내고 새로운 우희가 되려는 자의 위악스러운 태도를 견디고 있다. 치욕을 삼키는 것도, 데이를 향한 죄책감에 괜스레 격분하는 샬루를 단장시켜 공연을 무사히 올릴 수 있도록 상황을 정리하는 것도 데이의 몫이다. 텅 빈 무대 뒤에 오도카니 서서 자신이 아닌 우희와 패왕의 연기를 듣던 우희. 그는 유일하게 곁에 남아준 주샨에게 감사를 전한 뒤, 하지만 샬루의 사랑인 주샨을 끝내 받아들이지는 않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꼿꼿하게 걸어나간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해도 명작의 가치는 그대로다. 지금도 <패왕별희>는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거대한 이념이 개인의 삶을 집어삼키던 시대의 아이러니를 담아낸 감독의 의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빛과 고요한 밤의 어둠까지 기민하게 잡아내는 필름의 질감, 매 장면 잊을 수 없는 배우들의 눈빛까지 모든 것이 <패왕별희>를 아름다운 예술로 기억하게 한다. 어쩌면 이런 작품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기에 걸작의 역할 또한 분명하다. 우리를 이질적 시대와 장소로 데려가 인물의 삶과 감정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만드는 것. 나아가 인간과 생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 이는 영화가 선사하는 위대한 감흥이다.
Farewell My Concubine
감독 첸 카이거
주연 장국영, 공리, 장풍의
시놉시스
어렸을 때부터 함께 경극을 해온 ‘두지’(장국영)와 ‘시투’(장풍의).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한 아우와 형이지만, ‘두지’는 남몰래 ‘시투’에 대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시투’는 여인 ‘주샨’(공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 ‘두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데… 사랑과 운명, 아름다움을 뒤바꾼 화려한 막이 열린다!
1 comment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