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본다는 것
나는 그곳으로 간다, “You don’t know babe”에 겹쳐진 기타 소리와 함께.
소리는 냄새가 되고 냄새는 장면이 되어, 나는 그곳들로 갔다. 우리 집 테라스 그 의자, 우리가 함께 있던 그 Foz 바다, 오후 5시의 그 공원, 해가 내려앉는 그 Douro 강. ‘띵- 띵-’ 기타 소리가 흘러나오면 그곳의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나와 기타선율 사이에 자리한 수많은 ‘그’ 곳. 아직도 나는 H.E.R.의 <Best Part>로 포르투를 기억한다.
나도 외국에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포르투갈로 떠났다. 사람들은 내게 의미를 물었지만 특별한 이유나 계기는 없었다. 외국물을 먹으면 나의 표정과 몸짓이 바뀌지 않을까? 그럼 풍부한 단어들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나의 출발선이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안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다리가 달달 떨릴 만큼. 그럼에도 마음 한 켠, 생각지도 못한 멋진 일들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에 나는 포르투갈로 가야만 했다.
처음 맛본 이방인의 맛은 달콤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낮잠을 자다가 잠시 눈을 뜨면 머리카락 사이로 모래와 햇빛이 보였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놀고먹는 죄스러움은 증발해버리고 빨래처럼 바삭하게 말려지는 그 느낌이, 나는 참 좋았다. 그을린 햇볕 냄새가 들숨과 함께 코로 들어오는 그때 그 순간의 평온함이란. 그것은 분명 행복과는 다른 느낌의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마음들이 몽글몽글, 구름처럼 생겨났다. 그때엔 설명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그 노래를 꺼냈다. 전주의 기타 소리가 흘러나오면 주변의 시간들은 하나, 둘 내 두 손 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모으는 중이었다.
그렇게 평생의 행복을 다 끌어다 쓰고 있는 것 같았던 여름은 해와 함께 짧아져갔고, 포르투의 겨울에는 우기가 시작됐다. 그 겨울 속 나는 비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것에 젖어 지냈다. 나는 이방인의 외로움에 어쩔 줄 몰랐고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서라도 그 시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외로움의 하루를 살아내는 것밖에 없었고, 그 외로움에 대처하는 자세를 기르는 동안 <Best Part> 위에는 먼지가 조금씩 내려앉아 점차 잊혀갔다.
계절이 그러하듯, 외로움에 잠겨 지냈던 그 겨울도 지나가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던 12월 31일. 광장에서 새해 카운트다운 공연을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포르투갈에서의 삶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까?’ 애초부터 없었던 ‘의미’를 묻는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무대에서 코에 익은 전주가 흘러나왔다. H.E.R.의 <Best Part>였다. 그 노래는 끝나버린 줄만 알았던 그을린 여름 냄새를 시린 코끝으로 데려왔다. 그 기타 소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반짝이던 여름만이 최고의 순간이라 여겼겠지만, 내가 외로움에 낙엽처럼 바스러졌던 겨울도 최고의 순간이라고. 포르투의 모든 계절은 진실로 진실로 풍요로웠다고 말이다.
포르투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H.E.R.의 <Best Part>를 꺼냈다. 포르투가 내게 알려준 것들이 함께 흘러나왔다. 나는 그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방인의 삶을 툭- 덮을 수 있었다. 그러곤 귓속말로 무언가 얘기하듯 낮게 속삭였다. “살아보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