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희수는 입원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아직 항암 주사를 맞지 못했다. 입원 당일 갑자기 열이 나는 바람에 열과 염증 수치를 내리는 치료를 받으며 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오후 4시, 6인 병실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희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 시간에 낮잠을 잤다. 오전에 퇴원 환자가 나간 자리에 오후 2시 전후로 입원 환자가 들어오는데, 입원이 처음인 환자들도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병실에 완벽하게 적응해 낮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병원 침대에만 누우면 이상하게 몸이 까라지고 졸렸다. 왜 입원만 하면 잠이 쏟아질까, 희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엄마는 병원에 멀쩡한 사람도 환자로 만드는 이상한 기운이 흐른다고 말했다. 입원할 때마다 자고 또 자느라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던 희수와는 달리, 엄마는 매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엄마는 보호자 침대에서 토막잠을 자다가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매번 몸서리를 치며 일어났다. 이번이 다섯 번째 입원이지만 엄마는 여전히 이곳이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핸드폰 시계는 4시 10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 한 시간 넘게 남았다. 희수는 눈을 잠시 붙여보려 애썼지만 평소와는 달리 정신이 또렷했다. 학교에 있다면 세계지리 문제를 풀고 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명치가 뜨거운 동시에 아려왔다. 그건 암으로 인한 통증과는 분명히 다른 아픔이었다. 오늘은 수능 모의고사 날이었다. 선택과목Ⅰ의 문제지를 제출하고, 선택과목Ⅱ 시험지를 받아들어 풀고 있을 시간에 희수는 병원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 입원을 하지 않았더라도 모의고사를 보진 못했을 것이다. 학교는 이미 두 달 전에 휴학했다.

희수는 사회탐구 선택과목으로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투(Two) 지리’를 고집했다. 등급을 잘 받기 위해서는 응시자 숫자가 많은 ‘사회문화’와 ‘생활과 윤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지침이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정설처럼 돌았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는 그 두 가지를 3학년 내신 과목으로 지정해 놓았다. 탐구 과목 공부는 막판 스퍼트가 중요해서 고3 내신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과목이 수능 점수를 잘 받는 데 유리하다고 했지만, 지리는 희수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희수는 이국의 지명을 읊조릴 때마다 입가에서 도는 휘파람 소리가 좋았다. 지도에 색연필을 칠해가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기후와 지형, 산업을 외울 때면 괜히 신이 났다. 그건 암기라기보다는 미래에 도착할 장소에 대한 지식을 마음에 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행 작가가 되거나 지리학자가 되겠다고, 열여덟 살의 희수는 책상 위에 지리부도를 펼쳐놓고 다짐하곤 했다. 정해진 대로 살지 않을 거야, 유불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될 거야.

예기치 않은 병으로 병원에 누워있는 지금, 희수는 좋아하는 과목을 고등학교 2학년 때 배워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지리가 고3 내신 과목이었다면 영영 배울 수 없었을지도 몰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영원히 몰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난 해 보낸 시간들이 마냥 귀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오늘 모의고사를 보았다면 지리는 당연히 1등급이었을 텐데, 희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세계지리 문제를 풀고 있을 시간에 병상을 지키게 된 것은 결코 희수의 선택이 아니었다. 골육종이라는 희귀병, 그것이 왜 하필 희수의 무릎 뼈에 깃들었는지 원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항암 주사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치료 방법이라는 의료진의 말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주치의는 항암 치료에서 차도를 보이면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어느덧 30분이 지나 있었다. 탐구 과목 시험이 모두 끝나고, 제2외국어만 남겨둔 마지막 쉬는 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모두들 긴장이 풀린 채로 교실은 아주 소란스럽겠지. 희수는 선택 과목 답안지를 제출하자마자 지리를 택한 다른 아이들이 달려와 자신에게 답을 맞춰보자고 하던 장면이 떠올라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자주 가던 수험생 카페를 찾았다. ‘6월 모평 세계지리’를 검색하자 실시간으로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로 어려웠다는 의견이 많아서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궁금증이 커지던 와중에, ‘사회문화에서 세계지리로 선택 과목 변경해도 될까요ㅠ’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 6월 모평에서 사회문화 완전 망치고, 세계지리로 선택 과목 변경 고민 중이요ㅠㅠ 원래 지리 좋아하기는 하는데 응시자 많은 걸로 해야 한대서 사회문화 선택했거든요. 근데 사문이랑 너무 안 맞네요. 지금 세지로 갈아타도 될까요? 수능 5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지리 어렵다는 말이 있어서 고민되네요. 괜찮을까요? 너무 늦었나요? ㅠㅠㅠㅠ

다급함이 느껴지는 질문 내용에 희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댓글을 작성했다.

↳ 아니요, 하나도 안 늦었어요. 지금부터 열공하면 얼마든지 등급 잘 받을 수 있어요! 세계지리 외울 거 많긴 하지만, 지리 좋아하시면 오히려 재미있을 수도요^^ 세지 선택 강추 드려요!
↳ 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님은 이번 모평 세계지리 당연 1등급이겠죠? 수능도 대박나시길 기원해요!
↳ 저는 사정상 모평 못 봤고요, 수능도 내년에 도전하려고요^^; 올해는 님이 먼저 대박나세요!

댓글과 대댓글이 오가는 내내 희수는 저도 모르게 킥킥 웃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내년 겨울에는 반드시 수능시험을 보겠다고, 내후년에는 대학에 입학해 배낭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희수는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었고, 버킷리스트에 수많은 여행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볼리비아의 유우니 소금사막, 호주의 울룰루, 그리고 밤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캐나다의 옐로우 나이프…… 희수는 그곳에 가닿을 미래의 자신을 기약하면서 약해지지 않을 거라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