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있어(2016), 종현

‘바벨피시’라는 물고기가 있다. SF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외계 생물로, 귀에 넣으면 어떤 언어든 즉시 통역해준다. 내 귀에는 이 바벨피시와 비슷한 생물이 산다. 이름 하여 바벨훈트. 몸통이 꽤 길쭉한 이 녀석을 귀에 넣으면, 모든 노래가 전지적 개 시점으로 바뀌어 귓가로 흘러든다.
나란히 앉은 개와 눈을 맞춘다. “어떻게 나에게 그대란 행운이 온 걸까”(아이유, 〈밤편지〉) 놀랍기만 하다. 앞발에 턱을 괸 개의 옆모습은 “우아 우아 우아해”(크러쉬, 〈우아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다가도, 사라져도 모를 사람 같다가도, 날 부르는 네 목소리에”(트와이스, 〈Feel Special〉) 우울을 털고 일어나 산책에 나선다. 내 친절이 “고맙지 않을 만큼 더 당연하길”(키, 〈I wanna be〉) 바란다. 더 잘해주고 싶다. 행복만 주고 싶다.
다섯 살배기 닥스훈트와 함께 살고 있다. 이름은 빌보. 내 귀에 들어앉아 어떤 노래든 개를 생각하며 감상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귀뿐 아니다. 눈에도 찰싹 들러붙어서 개의 시선으로 보라고 채근한다. 덕분에 깨닫고 말았다. 그동안 내 귀와 눈에 얼마나 자기애가 철철 넘쳤는지를.
예전에는 튼튼한 운동화 밑창으로 무심히 지르밟고 지나가던 길바닥 쓰레기에서 이제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본다. 얼른 줍는다. 이 길을 오가는 존재가 모두 나처럼 신발을 신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몰랐을까. 인간이 길을 전세 낸 듯 살았다. 산책 나온 개, 낮잠 자는 동네고양이, 부리로 뭔가를 쪼는 새가 틈틈이 눈에 보였는데도 말이다.

“가끔 눈이 돌아갔어 / 넌 자주 뒤를 돌아봐줘 / 내가 널 따라 잘 도는지 / 이 궤도가 맞는지 꼭 확인해줘”

종현이 〈우주가 있어〉의 후렴구를 부르면, 나는 버릇처럼 빌보를 떠올린다. 실은 “Uh”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부터다. 종현은 이 곡을 ‘관심 있는 상대에게 능글맞게 수작 거는 노래’라고 설명하곤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내 귀에 바벨훈트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고 하니.
다 ‘꼬리 라임’ 때문이다. 도입부의 “깜짝 놀라는 내 꼴이” “장난스런 네 입꼬리” 같은 표현에 저절로 빌보의 잘생긴 꼬리가 떠오른다. 뒤이어 어떤 장면을 본다. 꼬리를 당당히 세우고 앞장서는 빌보와 그 뒤를 졸졸 따라 걷는 나, 산책길 우리.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장소를 걷는다. 그래도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한결같다. 억새풀처럼 생긴 털 많은 꼬리를 휘날리는 빌보의 뒷모습이다. 꼬리 움직임을 유심히 본다. 편안한지, 즐거운지, 긴장되는지, 겁먹었는지. 꼬리가 알려주는 정보에 따라 산책 동선을 조정하느라 풍경은 감상할 틈이 없다.
지금 행복해? 가끔은 꼬리 말고 귀에 대고 묻고 싶다. 내가 너의 몸짓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내가 무심코 밟고 지나친 유리 파편이 너와 네 친구들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종현에게도 묻고 싶은 게 많다. 〈우주가 있어〉의 꼬리 라임이 반려견 루에게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은 아닌지. 노래마다 묻어나는 사려 깊은 태도, 다정한 마음, 장난기 어린 위트가 어쩐지 네가 닮은 동물로 꼽곤 하던 개를 생각나게 한다는 걸 아는지.
언젠가 내가 말을 잃으면, 그때 우리 우주에서 만나 서로의 귀에 물고기를 넣고 밀린 질문에 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