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잘 만든 여성 중심 서사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특별하다. 절대적인 편수도 적거니와 제대로 그려내기란 더 쉽지 않아서다. 대상화되는 데 그치는 소모적 캐릭터가 아닌, 자신만의 또렷한 역사와 의지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묘사. 캐릭터의 설정과 묘사에 있어 당연한 이 요구가 때론 가혹하리만치 여성 캐릭터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백델 테스트(창작물 내 젠더 평등이 얼마나 반영됐는지 알아보는 테스트) 같은 게 고안됐겠는가. 테스트 항목은 간단하다. 창작물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 명 이상 등장하는가, 그 둘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대화의 주제는 남성이 아닌 다른 것인가. 누군가는 너무 단순한 기준 아니냐고 하겠지만, 의외로 대다수의 영화들이 이 단순한 기준마저 통과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영화다. 여기에는 남성 캐릭터가 없다. 주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어진 역할 자체가 없다. 심지어 시대 배경은 18세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인생이 숙명처럼 주어져있고,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조차 열 수 없는 시대다. 동성 간의 사랑은 당연히 금기다. 영화는 이 모든 시대적 억압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해당 단어들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대 풍경의 한 가운데에서, 평등과 주체성 그리고 평생 기억될 사랑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정말 아름답다.

이야기는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프랑스 브리타니 지역의 한 섬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화가인 그는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결혼 상대에게 전달될 용도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상대가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면, 결혼이 성사될 참이다. 엘로이즈가 모델로 서는 것을 거부해왔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안느에게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산책 친구라는 가짜 명목으로 엘로이즈를 만난 마리안느는 몰래 그를 관찰하며 초상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림을 위한 관찰이라는 설정 덕분에, 영화는 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선과 보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면서 영화는 두 사람이 미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는 것을 본격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의 핵심은 서스펜스가 아니다. 마리안느가 이곳에 온 목적은 곧 밝혀지기 때문이다. 완성된 그림을 본 엘로이즈는 “이 그림은 나를 닮지 않았으며 당신다움도 없다”며 화가와 모델로서 제대로 작업할 것을 제안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관찰하듯, 모델로 선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를 계속해서 바라본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 물리적 접촉이 있기 전에도 영화는 관능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상대를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의 시작임은, 영화와 관객 사이에 이미 이루어진 자연스럽고도 암묵적인 합의와 같다. 이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화가와 뮤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은 그림을 위해 토론하고 협업하는 파트너다. 중요한 주제는 모두 여성을 비켜간다고 할 정도로 화가로서 제약이 많았던 마리안느를 위해, 엘로이즈는 오직 마리안느만이 그려낼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한다.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의 낙태, 자신의 드레스에 불이 붙어 타오르던 찰나,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느껴야만 그릴 수 있는 ‘살아있는’ 초상화. 마리안느의 예술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임신 사실을 알고 스스로 낙태를 결정하는 하녀 소피를 둘러싼 서브플롯은 평등과 주체성, 사랑과 연대라는 영화의 결을 더욱 단단히 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갑갑하고 고립된 섬 같았던 이 공간은 세 여성의 자유로운 휴식처로 탈바꿈한다. 셋은 소피의 낙태를 돕고, 함께 요리를 하고 카드 게임을 하며, 오르페우스 신화(이 역시 시선과 돌아봄에 대한)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토론한다. 물론 안온한 며칠이 지나고 다시 집 밖으로 나섰을 때 이들을 향한 사회적 제약은 여전할 것이며, 종교를 기반한 도덕은 이들의 삶을 엄격한 규율로 이끌 것이다.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한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마음껏 사랑하고 자유롭게 꿈꾸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타오르던 장작불의 뜨거움, 힘찬 파도와 파란 하늘이 조화롭던 바닷가의 풍경,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던 머릿결을 바라볼 때의 감흥은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들의 것이다. 마지막 장면, 극 중 인물들의 시선과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적극적으로 얽혀들 수밖에 없는 숏을 통해 영화는 기억의 환희를 이야기한다. 서로의 몸과 마음에 각인된 기억은 때론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것보다 강렬한 것임을. 그 사랑이 평생을 기꺼이 기억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감독
 셀린 시아마
주연 아델 하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시놉시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