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베스>(2016)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가 브르타뉴 섬으로 들어가는 도입부, 뱃사공들은 마리안느가 가져온 캔버스와 화구들이 물에 빠지는 걸 보고도 무심히 노를 젓는다. 마리안느가 화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어 화구를 건져내는 동안, 뱃사공들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도 마리안느를 돕지 않는다. 아마 마리안느에게 캔버스가 목숨을 걸고 건져낼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여자 화가가 드문 탓에 그림 출품도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여자가 결혼과 출산 말고 다른 일을, 그것도 그림을 그려 제 생각을 표현하는 고차원의 노동을 할 수 있을 거란 상상은 뱃사공들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겠지. 몰이해 속에서 혼자가 된 마리안느는 흠뻑 젖은 몸으로 브르타뉴 섬을 오른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아델 에넬)와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진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많이 닮았으니까. 세상을 떠난 언니 대신 원치 않는 결혼을 하기 위해 수녀원에서 세상으로 불려 나온 엘로이즈에게, 브르타뉴 섬은 감옥과도 같다.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바다만 바라보는 엘로이즈에게서 마리안느는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발견한 건 아니었을까.

“그러는 당신은 언제 결혼해요?”
“할지 모르겠네요.”
“안 해도 돼요?”
“네,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을 거라서요.”
“선택할 수 있으니 날 이해 못 하죠.”
“이해해요.”

그래서 엘로이즈의 어머니 백작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서로를 다시 발견한다. 이번에는 신분의 격차를 넘어, 화가와 모델 사이의 불평등한 시선의 권력도 넘어서. 18세기 프랑스는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든 여성들을 고르게 억압하는 사회였다. 그 억압 속에서 만난 젊은 두 여성은, 상대를 대등하게 마주볼 수 있게 된 순간 거리낌 없이 상대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욕망을 피워 올린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후반부 배경인 ‘백작부인이 자리를 비운 5일 간의 브르타뉴섬’은, 억압의 경험을 공유한 여성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랑의 실험을 위해 설계된 일종의 실험실이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비슷한 실험실을 우리는 <레이디 맥베스>에서도 목격한 적 있다. 부유한 지주 알렉산더(폴 힐튼)의 아내로 팔려 온 캐서린(플로렌스 퓨)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다. 시아버지 보리스(크리스토퍼 페어뱅크스)는 빨리 손주를 낳을 것을 요구하지만, 남편은 알몸의 캐서린을 벽 앞에 세워놓고 혼자서 욕정을 달랠 뿐 캐서린과 동침하지 않는다. 시아버지가 원하는 건 안정적으로 부를 상속해 줄 사내아이고, 남편이 원하는 건 교감이 아니라 욕정을 달랠 눈요기거리다. 이 굴욕적인 결혼 속에서 캐서린은 잠도 온전히 잘 수 없다. 남편보다 먼저 잠이 들기라도 하면, 시아버지의 명을 받은 하녀 아나(나오미 애키)가 자신을 자꾸 깨운다. 깨어 있어야 남편과 잠자리에 들고 그래야 손주를 낳을 수 있으므로. 팔려온 이 성 안에서는 수면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자리를 비운 어느 날, 캐서린은 소작농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을 만난다. 캐서린은 아나를 욕보이려던 세바스찬을 제지하고 혼내려 하지만, 세바스찬은 어리고 권력이 없는 마님 캐서린을 딱히 두려워하지 않고 캐서린은 그런 세바스찬을 눈 여겨 본다. 캐서린과 세바스찬은 억압과 착취의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지녔고, 서로가 서로를 한 귀퉁이씩 밟고 선 불안한 균형 속에서 눈을 맞출 수 있다. 육체적으로 더 강인하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라는 점은 남편과 다를 게 없지만, 적어도 신분만큼은 캐서린이 훨씬 위니까. 그래서 세바스찬이 자신의 침소로 들어와 헛수작을 부리던 밤, 캐서린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세바스찬과 몸을 섞는다. 두 사람의 위계 또한 둘의 몸뚱아리처럼 복잡하게 뒤엉킨다.

있는 줄도 몰랐던 제 욕망을 발견한 캐서린은 이제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제 자신으로 살기 위해, 캐서린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자신을 다그치는 시아버지를 독살하고, 제 부정을 눈치 채고 모멸감을 주려던 남편 앞에서 보란 듯이 세바스찬과 뒤엉킨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자 캐서린은 부지깽이로 남편을 패 죽인다. 원작 소설에선 불행한 파멸을 향해 굴러 떨어지던 주인공은, 영화에선 손에 반복해서 피를 묻히며 끝까지 살아남는다. 괴물이 된 캐서린이 불행해 보이는가? 난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는 제 자신인 채로 괴물이 되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했음에도 꿋꿋하게 책 28페이지를 짚어서 손에 든 채 초상화를 남긴 엘로이즈처럼, 그 엄청난 사건들을 겪고도 캐서린은 제 욕망을 굽히지 않았다.

캐서린은 자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았을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서로에게서 평생을 간직할 사랑을 발견할 거란 사실을 알았을까? 미처 몰랐을 것이다. 자신과 흡사한 억압을 당한 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마주 선 순간에서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안다는 건 제 본질을 깨닫는 일이다. 누군가는 제 안에서 괴물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제 안에서 사랑을 끄집어 올렸다는 차이는 선명하지만. 그래서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누구나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레이디 맥베스>(2016)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
주연 플로렌스 퓨
시놉시스
남편에게 종속돼 모든 자유를 빼앗긴 캐서린, 고요한 저택에 갇혀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하인 세바스찬에게서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때부터, 그녀는 모든 금기를 깨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