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성인의 맛
프린스와 NPG의 91년 앨범 《Diamonds and Pearls》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공테이프에 녹음 하던 시절의 나에겐 꼭 가져야할 음반이었다. 동네 음반가게에서 이 테이프를 발견했을 때 〈Cream〉, 〈Get Off〉, 〈Money Don’t Matter 2 Night〉, 같은 곡목이 다이아몬드와 진주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배캠에서 들었던 주옥같은 명곡들이 실려 있다니!
당시 토요일 코너였던 아메리칸 탑포티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차트곡들이 흘러나왔고, 진정한 팝의 향연이었다. 워크맨에 집어넣고 음악을 듣다가 B-사이드 마지막 두 번째였던 〈인세이셔블〉의 도입부에서 시작된 충격이 끝까지 가시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호르몬 분비가 왕성하던 시절 교실 한쪽에선 출처를 알 수 없는 도색 잡지가 책상 열을 바꿔가며 오가고 있었고, 누군가 동네 비디오가게 다락방에서 봤던 비디오 이야기를 시작하면 눈은 책을 보고 있지만 달아오른 귀를 내내 열어두고 있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욕망의 모호한 대상》 같은 비디오 제목만으로도 성인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모호했던 때, 지금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Adult의 부사형인 Adultery가 왜 하필 간통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단어였는지, Adult로 시작하는 말들은 왜 하나같이 부정적인 함의를 띄고 있었는지, 과연 성인이 되면 우리는 곧장 타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지…
〈인세이셔블〉은 Adult와 연관된 모호하고 부정적인 성인 관념의 한편에 달큰한 쾌락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중2 모범생(?)의 내면에 팝음악의 형태로 심어주었다.
지금 들어보면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지극히 노멀하고 진부한 정서나 분위기가 별 다른 울림을 주지 않지만, 서서히 고조되는 프린스 특유의 팔세토 창법, 인간 같지 않는 세상에서 들리는 듯한 각종 악기들은 중1때 읽었던 금성출판사 주니어 공상과학 명작선의 지극히 성인적인 카툰을 통해 접한 SF적 세계관에 성인의 무드를 얹혀서 한 편의 어덜트 스페이스 오페라를 펼쳐 보이는 듯했다. 노래의 구성도 뮤지컬 같은 음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잔뜩 기대감을 주는 도입부, 절제된 악기의 배치, 아주 예의바르고 솔직한 대사들이 잘 짜인 각본처럼 이어지면서 노래속의 연인들은 서로를 찍어주기도 한다. “Tonight, We Video.” 프린스의 보컬은 또 어찌나 뻔뻔하게 연기하듯 감미롭게 대사를 내뱉는지, “탐욕은 내 이름이지, 오직 너에게 관한 한…”
다분히 이성애 중심적이며, 완벽히 가공된 남녀의 사랑 행위를 찬양하는 노래의 판타지는 그 메시지가 너무 당당하고 진부해서 80년대 미인 선발대회의 과장된 헤어스타일이나 색조화장을 연상케 한다. “I’ll show you my-, If you show your-” 같은 정말 귀를 막고 싶은 오글거림도 있지만.
단지 이 노래 때문에 프린스의 앨범을 더 구매하기 시작했고, 프린스를 더 잘 알게 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금도 동묘 길바닥에서 우연히 이 앨범을 만나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멜로디는 한결같이 〈인세이셔블〉의 도입부다. 그래서 결국엔 집어 들어 가게에 진열된 붐박스에 테이프를 넣고 곡을 다시 들어보곤 한다.
“불은 다 끄고, 촛불을 켜!” 지금은 피식 웃음이 나오는 도입부.
결국 우리는 성인이 되고, 특별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도 급박한 전개의 드라마도, 무절제한 충동도 없이 부석거리는 소음만 겨우 내며 어른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멀리 갈지 알 수가 없네, 탐욕이 내게 오는 순간, 나는 만족할 줄을 모르고, 멈출 수가 없어, 목마르지 않아도 하나도 남김없이 마실 수 있을 것 같던” 갈증이 드디어 고갈된 것일까? 그렇게 우리는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었다. 무미건조함을 음미하는 우리 모두는 이미 성인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을 극화했던 천재 프린스도 지금 우리와 같은 공기 속에 있지 않아 이제 이 노래를 들으면 모호했던 사춘기 시절과 프린스에게 작별을 고하는 애도의 기분이 드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린스. 잘 가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