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지금 기정은 T시의 민박 예약 사이트에서 건물 외관 사진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몇 해 전의 어느 날이었다.
“저기서 이 주를 지냈어.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는데.”
작년 여름에 말이지. 아니, 재작년 여름이구나. 이제는 삼 년이 지났네. 그 여름에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이우의 시선이 오래된 건물 이층에 머물렀다. 기정은 이우가 누구와 머물렀는지 알고 있었다. 함께 사는 동안, 기정과 이우는 매해 T시로 휴가를 갔다. 어떤 날은 그 건물 앞을 다섯 번 지나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우가 매번 그해의 여름을 언급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우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기정에게 상처가 될 일을 부러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길 건너편에서 걸음이 느려진다거나, 이층 테라스가 열려있는 날이면 누군가를 찾는 듯 눈으로 더듬는 것은 이우가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이었다. 간혹 그 여름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한숨처럼 말을 꺼내고는 기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조금은 생경하다는 눈빛으로 기정을 새삼스럽게 훑어본 후, 이우의 눈빛에는 어떤 체념이 채워지곤 했다. 아, 그렇지. 지금 나는 이 여자와 이러고 있지, 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우는 기정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었다. 그런데도 집을 의식하는 이우의 모든 행동이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새어 나온 반응이라는 사실이 기정을 미치게 했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던 기정은 집주인에게 메일을 적었다.
세 달 렌트를 할 수 있나요. 가능한 한 빨리 계약하고 싶습니다.
숙소는 비용이 상당했다. 이 돈이면 호텔에 묵는 것이 더 나았다. 게다가 T시를 거점으로 모든 일정을 짜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그런데도 기정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어제 행사에서 무이와 마주친 후, 기정은 이우를 떠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굳이 T시의 숙소를 선택하려는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이트에서 이 집을 발견한 순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은 오랫동안 기정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 여름에 말이야.
기정은 다시 떠오르는 이우의 목소리를 밀어냈다. 모니터 화면 아래를 보니 오후 한 시였다. 이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행사에 무이가 참석할 거라는 사실을 이우에게 알린 후, 두 사람은 행사에 대해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이우가 기정을 차로 태워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기정은 무이와 마주쳤을 때 일어날 상황에 대해 수도 없이 생각해보았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불편할 것은 뻔했다. 기정은 과거에도 몇 차례 이런 불편함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 여자가 남자친구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어. 그때 그 여자가 날 보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
기정이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인 날이었다. 무이가 해외 출장으로 며칠 집을 비운 동안 두 사람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이와 이우의 집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기정은 불안했고, 그런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이우는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럴 일 없어. 그 사람은, 그런 행동 안 해.”
이우는 가까이 다가와 기정이 바라던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때 이우가 내뱉은 말은 불현듯 기정의 기억 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무이에 대해 떠올릴수록 기정은 무이에 대해 더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무이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 무이는, 이전에 마주쳤던 어떤 사람들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우는 들떠있었다. 차에서 내릴 것도 아니면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이우의 행동에 기정이 “바로 집으로 올 거 아니야?”라고 묻자 이우는 “나간 김에 친구들도 좀 만나고 오려고”라고 온순하게 말했다.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아니야? 이우씨, 그래 보여.”
“그래 보여?”
이우는 기정의 말을 반복해 중얼거리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평소 창백한 피부가 오늘은 유독 화사해 보였다. 기정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평소처럼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과하게 만들어 낸 아무렇지 않음이 되려 어색해 보였다.
행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우는 창문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몇 초간 차는 멈춰있었다. 기정이 건물 입구에서 돌아보자, 그제야 차는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기정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득 불안한 마음에 다시 건물 입구로 급히 걸음을 돌렸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건네는 인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그녀는 건물 앞에 서서 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러나 이우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긴장을 풀며 돌아서던 기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기정은 한눈에 무이를 알아보았다. 집에 남겨진 사진첩에서 수도 없이 봤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진과 실제는 많이 달랐다.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감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무이는 여성스러웠다. 이런 감상에 기정은 잠시 당황했다. 표정 없이 사람들을 둘러보는 무이의 얼굴은 무심해 보였다. 기정은 사진 속 무이를 떠올렸다. 짧은 머리에 눈과 입이 맞닿을 듯 환한 웃음을 짓던 모습이었다. 눈앞의 무이는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무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 순간, 기정은 무이의 얼굴에 일어나는 변화를 확인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은, 그런 행동 안 해.
이우는 무이의 이름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무이를 지칭해야 할 때는 주로 그 사람, 이라는 표현을 썼다. 처음에는 기정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이는 이우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이우는 이제 무이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우는 무이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무이가 눈앞의 사람을 보며 웃었고, 기정은 알 수 있었다. 무이가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무이가 거기 있었다. 무이의 웃음은 그랬다. 당신이 나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무이는 특별해 보였다. 기정은 충동적으로 무이에게 걸어갔다. 무이의 얼굴에서 저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정 자신이었다. 기정은 무이의 앞에 섰고, 자신의 확신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확인했다. 그것이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기정은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네요.”
그러나 무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기정은 알게 되었다. 무이의 웃음이 반드시 그녀의 진심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무이의 얼굴에 웃음이 자리 잡았다. 그 웃음의 온기가 무이의 시선에까지 번졌다. 당혹스러울 만큼 기꺼운 환대였다. 그런 무이 앞에서 기정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라고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무이의 눈썹이 위로 슬쩍 들렸다.
“누구한테서요?”
무이의 질문에 기정은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답이 빤한 질문을 던지며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무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이 남아있었다. 기정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우씨가 무이씨 얘기 많이 했어요.”
“아……, 어떤 얘기를 들었을지 걱정되네요.”
정말로 걱정이라는 듯 무이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녀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걱정할 만한 내용은 없었어요.”
무이가 가만히 기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음……, 이라는 소리를 내며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였다.
“나는 걱정되는데요. 내가 기정씨에 대해 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그러더니 무이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나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까.”

기정은 집주인에게 메일을 보내고 집 앞 편의점에서 김밥을 한 줄 사 왔다. 이우의 신발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한동안 서 있었다. 거실을 채운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것과 이우의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것도, 이우의 것도 아닌 것들 역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자연스레 집에 녹아들어 간 물건들이었다. 기정은 느리게 움직여 구두를 벗었다.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여전히 다른 이들의 집이었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