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기쁨과 슬픔
그런 노래들이 있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나를 ‘오래전 그곳’으로 훌쩍 데려가는 마법과도 같은 노래들. 하림의 <출국>은 10년 전 첫 직장을 관두고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을 눈앞에 펼쳐놓고,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는 지난해 태국 남부 한 작은 섬에서 온몸으로 맞던 미풍을 이곳으로 불러온다. 윤종신과 박선주가 함께 부른 <우리 이렇게 스쳐보내면>을 들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그해 어느 겨울밤 산울림소극장 앞 횡단보도에 교복 차림으로 서고 만다.
1992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의 일이다.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부모는 자기들에게 닥친 시련을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느라 서로를, 그리고 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는 나를 괴롭히는 새끼가 있었고, 집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냥 모든 게 지겨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티브이 연속극 같기만 한 ‘인생’을 당장이라도 꺼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연극을 보러 다녔다. 당시 산울림소극장에서는 윤석화의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장기 공연 중이었다. 내 기억으로 배우 윤석화는 그 시절에 가장 빛났다.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의 무대를 보는 건 그 자체로 가슴 벅찬 일이어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극장을 찾았다. (요즘 덕질 용어로 말하자면 회전문을 돈 셈인데, 중학교 3학년의 빠듯한 주머니 사정으로는 꽤 호사스러운 취미였다) 용돈을 어렵게 모아 산 티켓을 손에 쥐고 가파른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동굴 같은 극장 입구가 나타났다. 여기와는 다른 세계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나는 객석에 앉아 빈 무대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해 8월에 발매된 공일오비 3집 수록곡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은 나를 바로 그 세계로 이끌어준 믿음직한 가이드이자 속 깊은 친구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헤어진 그대를 이렇게 마주칠 줄 몰랐어. / 지나간 나날들 속에 서로의 길 걸어왔지. / 모든 게 변해버린 우리 서로의 상처 기억해도 지난 날 아쉬워.”
사람들로 북적이는 신촌 전철역을 빠져나와 산울림소극장이 있는 서교동까지 천천히 걸으며 같은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윤종신과 박선주의 애절한 목소리는 최선을 다해 나와 같은 속도로 걸어주었다. 당시의 내 상황과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전형적인 이별 노래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감응했다. 그러다 문득 얼굴을 때리는 찬바람에 눈물이 흐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마치 내가 근사한 이야기 속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것이 노래가 주는 가짜 슬픔이란 걸 알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슬픔은 신기하게도 보잘것없는 내 진짜 슬픔을 지워주었다. 기뻤고 또 슬펐다.
“아빠는 인생이 어땠어?” 며칠 전 저녁을 먹고 이를 닦는데 아이가 물었다. “내 인생?” “그럼 아빠 인생이지 누구 인생이겠어.” 얘가 갑자기 왜 이럴까. 나는 세면대 거울 속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궁금해. 아빠의 기쁜 인생, 슬픈 인생 다.” (아내 말에 따르면)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틀어주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푹 빠졌다는데, 설마 그 영향인가. ‘아홉 살 인생’을 사는 아이의 머릿속을 상상하다가 도무지 답이 안 나와서 ‘너무 긴 인생이라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 상황을 대충 모면했다.
그날 이후 아이는 내 인생을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좀 서운하다. 언젠가 아이는 타인이 아닌 자기 인생을 궁금해하겠지. 그때 이 노래에 얽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살다 보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헤어”지는 것이 비단 “그대”만은 아니더라, 따위의 말은 덧붙이지 않겠다. 그저 행운을 빌어줘야지. 그 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 또한 그런 노래 하나쯤 가지길 바란다고. 말없이 어깨를 내어주고 같은 보폭으로 걸으며 세상의 무수한 슬픔에 대해 들려줄 그런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