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1992), 장필순

몇 해 전 어느 날의 일이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땐 열일곱이었고 편지 쓴 그해 스물이었던 여자아이, 그러니 지금은 스물넷이 된 여자아이 석희로부터. 편지는 정말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준에게, 라고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애의 ‘중력’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졌다. 당신이 나의 중력이에요.
그날 방에 앉아 물끄러미 편지를 들여다본 기억이 있다. 이상하게 바로 답장을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전엔 일기처럼도 편지 쓰곤 했는데. 상대가 답을 해주든 안 해주든 열렬히 편지하고 또 답장을 기다리곤 했는데. 그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내 편지를 받았던 이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그간 누구도 답장할 수 없는 편지를 썼던 건가.
그동안 석희의 빛나는 순간들을 많이 봐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애의 영상은 내게 무척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장면들을 보고 또 기억한다는 게 내게 어떤 일인지, 누구에게도-심지어는 그 애에게조차-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은 먹먹해졌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고 싶어.”

석희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가을의 일이다. 그때쯤 나는 10대들을 만나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했다. 거기서 만난 어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음속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곳에 왔다. 또 어떤 아이들은 학교를 그만두고는 거기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그곳에서조차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맴돌았다. 자리를 찾지 못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자연히 그런 친구들에게 마음이 갔다. 석희는 그런 친구들 중 하나였고.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첫 만남. 석희는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다가 내가 일하는 센터에 왔다. 그 애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일곱 명 남짓했던 그 수업 수강생 중 하나였다.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시간쯤 된 날이었을까. 강사는 학생들에게 꼭 표현하고 싶은 자기만의 단어를 하나씩 적어보라 했다. 그때 석희가 고른 단어는 ‘탈핵’이었다. 왜 그 단어를 골랐냐고 물었을 때 자신만의 논리로 석희는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달에서 지구를 보는 관점에서… 탈핵을 생각해요.
우리 모두 웃었던가? 이상하게도 감탄하는 마음이 들어 그 애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강사는 그럼 이 자리에서 그걸로 글을 한번 써보자고 모두에게 얼마간 시간을 줬다. 다들 책상에 턱을 괴거나 펜을 굴리면서 어떻게든 문장을 궁리하는데 석희 혼자 강의실 밖 하늘을 쳐다보더니(강의실 한 편에 큰 베란다가 있는 구조였다) 벌떡 일어났다. “날이 참 좋다!” 그 애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자연스레 유리문을 밀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마치 그곳엔 그 애와 가을 햇빛밖에 없다는 듯.
한참이 지나고도 석희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우리 모두는 그 애가 베란다 밖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석희야, 뭐해?” 석희는 그냥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고 했다. 헤헤 웃으며 그냥요, 그냥… 수줍게 재잘재잘 말하는 석희의 말을 듣다보면 마음이 복잡해졌는데 그건 그 애가, 내 안에도 그런 작은 소녀가 있음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땐/ 너는 많이 여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석희는 그후 내 앞에서 두 번 눈물을 보였다. 눈물을 펑펑 흘린 건 아니고, 애써 자기 마음을 추스르고 울먹이면서 그 애는 말했다. 검정고시를 혼자 준비하는 게 외롭고 쓸쓸해서 학교에 다시 다녀야 할까 고민이 든다고. 나는 저렇게 맑은 아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자주 느껴야만 한다는 사실에 쓸쓸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날 석희에게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도,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다만 듣고 있었을 뿐.
또 언제였던가. 그로부터 한 해가 지나고, 석희는 어느새 다시 학교란 곳에 가 있었고, 전보다 마른 얼굴, 그러나 전보다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지. 학교 다니는 게 힘든데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는 거겠죠, 여기서마저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워요. 그 애는 자기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견디고 있었고 내 앞에서 다만 그 말을 다짐처럼 꺼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나는 아무 말 해주지 못했다. 야위었지만 여전히 맑은 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너의 얼굴을 야위게 만드는 세상이란 어떤 곳인지, 그저 생각 같은 걸 하고 있었을 뿐.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땐/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그 애가 대학에 가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이제는 회사란 곳에 다닌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놀라곤 한다. 석희가 이제 독립도 했구나. 오늘은 야근도 했구나. 그 애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소식을 이따금 들여다보다가.

석희에게.

잘 지냈니.
우리가 마주 앉는다면, 그간의 많은 말들을 뒤로 하고 서로 웃겠지.
나는 네 생각보다 자주 너를 생각하곤 한단다. 하지만 연락하진 못했지. 그건 나답지 못한 일이었어.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렇게 되었지. 그러면서 세상의 이상한 일들을 전보다는 조금 이해하게 되었단다.
어른의 말투 같지. 내게도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 있었단다. 그런 화법의 이유를, 너로 인해 비로소 온전히 알게 되었지. 나는 그때 처음, 어른이란 존재가 내 생각보다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됐어. 마치 딱딱한 갑옷을 입은 섬처럼.

그런 때도 있었어. 네가 둘도 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가, 훌쩍 떠나버렸다고 느낄 때. 마음이 저리기도 했지. 너는 점점 더 아름다워질 테고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거고 때로 떠나가야 하지. 나는 그런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어. 다만 어디로도 먼저 떠나진 않는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단다. 네가 나에게 달려와 안겼던 날, 팔짱을 끼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알거렸던 날들을. 너를 만나면서, 나는 내가 잃었다 여긴 그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

우리가 다시 마주 앉는다면, 이 모든 말들을 뒤로하곤 묻겠지.
잘 지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