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하루에 커피를 다섯 잔씩 들이킬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와서는 전생처럼 느껴진다. 나이를 한 살 먹을 때마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교해지는 건 좋지만, 카페인 내성만큼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빨갛게 열려서 까맣게 볶아지는 그 아름다운 열매를 어느새 마음껏 누릴 수는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오후 3시 넘어서 마시면 밤을 꼬박 새고, 심지어 점심 직후에 마셔도 좀 위태롭다. 다음 날에 지장을 주지 않고 마실 수 있는 한계선은 이제 오전 10시에 머물러 있다. 오전 10시까지, 딱 한 잔.
그렇게 체질이 바뀌고 나서 바리스타 수업을 들었다고 말하면, 다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루에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시간 낭비, 돈 낭비를 하느냐고 친한 친구들은 솔직히 묻기도 했다. 하루에 한 잔이니까 그게 최고의 한 잔이 되길 바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은 적었다. 두 계절쯤 수업을 들으니 깨닫는 것들이 있었다. 핸드 로스팅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미보다 아프리카 원두를 좋아하고, 드립보다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구나……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기계는 천만 원을 훌쩍 넘기므로 도무지 집에다 구비할 수는 없었다. 수업의 강사였던 가을 씨와 무척 친해지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가을 씨의 카페는 집에서 자전거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었고, 가을 씨가 어마어마한 부지런쟁이라서 8시에 카페를 연다는 것도 마침맞았다. 카페가 지하철 역 바로 안쪽 골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근처 회사원들은 아침에 무슨 강물처럼, 강물 속의 물고기들처럼 카페에 들렀다 갔다. 나는 9시 반쯤 도착해서 10시에 마지막 한 방울을 마셨다. 마실 때마다 감탄했다. 살 것 같았다. 가을 씨는 내가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다는 걸 안타까워했기에 매일 최상의 원두로 특별한 신경을 써서 준비해주었다. 그런 가을 씨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나 정말 어떡하지?”
봄가을에 찾아오는 알러지성 비염이 문제였다. 20대 때는 전혀 없던 증상이 30대 후반에 이토록 심해질 줄은 몰랐다고 한다. 치료도 받고 약도 먹지만 영 힘든 모양이었다.
“풀꽃들도 말이야, 민폐 좀 작작 끼치고 삽입 섹스 좀 하면 좋겠어. 풀꽃들이 번식하는데 내가 왜 괴로워해야 해? 커피 맛도 잘 안 느껴지고 이 계절만 되면 울고 싶다.”
가을 씨는 우는 대신, 커피 맛을 판별하는데 종종 나의 혀를 빌렸다. 세컨드 오피니언. 그것이 단골 카페에서 내 역할이었다. 지난 번 것보다 좀 시지 않아? 잡맛은 없어? 플로럴하지? 가을 씨는 진지하게 물었고, 언제부터 서로 반말을 썼는지도 모르게 친해져버렸다. 나 역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커피를 입 안에 머금으며 의견을 더했고 말이다. 그래서 가을 씨가 갑자기 존댓말로, 평소보다 심각하게 말해오자 긴장하고 말았다.
“이번 커피는 평소보다 예민하게 마셔봐줘요. 판도가 바뀔 수도 있는 원두라서 그래요.”
“판도가…… 바뀌어……?”
가을 씨는 어리둥절한 나를 내버려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잔에 진하면서도 맑은 커피를 내려 내밀었다. 천천히 마셨다. 코와 혀를 다 써서.
“어땠어?”
“미묘하게 평범한 맛이면서, 또 아로마는 엄청 풍부하네? 뭐야, 이 커피?”
“실험실에서 재배된 커피래. 농약도 안 쓰고 물도 엄청 안 쓴대. 전 세계의 바리스타들한테 평가해달라고 샘플이 왔어. 뭐라고 써야 하지? 맛있는 원두들을 아무렇게나 막 섞은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가을 씨가 쓰는 커피는 공정무역 커피였지만, 가을 씨도 나도 언제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커피는 열대우림을 파괴했고 환경을 오염시켰으며 현지 사람들은 커피를 생산해내느라 식량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하곤 했다.
“……과찬하자. 조금만 과찬해버리자.”
내가 말했다. 과찬해서, 이 임팩트가 약간 모자란 원두에게 기회를 주자. 더 나아질 기회를.
“역시 그쪽이 좋겠지?”
가을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찬사의 말들을 메모지에 끼적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깔끔하게 10시였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