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지만 닿지 않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처음의 순간들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 덕분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서라면 첫인상, 첫 키스, “사랑한다”고 처음 말했던 순간 등등… 몇 년이 흘러도 생생하다. 라디오 피디가 되었노라 통지받던 합격의 순간도 그랬다. 시간과 장소, 기분 탓에 들뜬 공기까지 오늘이 그날인 양 일기를 쓸 수도 있다. 초등학생 때 한참 지난 방학 일기를 쓸 때처럼 “참 좋았다”라고 진부한 마무리를 하지 않을 자신도 있다. 그때는 그랬… 어쨌든,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앵콜요청금지’를 사랑한다. 2007년에서 2008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장소는 꾸준히 더럽지만 특이하게 알록달록했던 과방. 공기는 오래된 라디에이터가 내뿜는 수증기와 콧김, 입김으로 꿉꿉했다. 나와 친구들은 과방 소파와 책상에 아무렇게나 모여 있었다. 우린 아마도 세상 고민을 내 고민 삼아, 내 고민을 세상 고민 삼아 심각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친구가 노래 한 곡을 추천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라고 했다. 무엇이 가수고 무엇이 노래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래서 가수 이름이 뭐라고? 왜? 무슨 뜻인데?”
‘가요톱텐’, ‘음악캠프'(지금은 ‘음악중심’), ‘인기가요’ 애청자에게 가수명은 평범한 개인 이름이나 단출한 영어 이름 정도였다. 팀 이름에 과일 이름이 들어간 것까진 봤어도(이를테면 파파야) 야채 이름은 처음이기도 했고.
내가 브로콜리너마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팀은 나에게로 와서 인디밴드가 되었다. 사실 인디밴드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 인디밴드구나 했다.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노래다. 친구가 노트북으로 ‘앵콜요청금지’를 틀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첫 번째 EP 버전이었다.
첫 귀에 반했다. 반한 이유는 많았다. 노래 시작을 알리는 보컬 계피의 들숨. 맑은데 쓸쓸한 구석이 있는 그녀의 목소리. 끝난 사랑을 ‘노래’와 ‘앵콜’에 빗댄 통찰력. (“안 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어딘가 부족한 음질이 주는 느낌적 느낌. (뒤늦게 안 사실―홈레코딩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서툴렀던 우리들이 서로의 표정을 조금씩은 감춰가며 과방에 모여 함께 이 노래를 들었다는 점까지. 발그스레한 얼굴은 과방에 스며든 한기와 낡은 라디에이터의 증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술 마시고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하고 싶을 때마다, 할 일 없이 과방에 모여 있던 그때의 ‘우리’를 더 이상 소환할 수 없단 걸 새삼 깨달을 때마다, 20대 초·중반만큼의 허무함이 밀려올 때마다 ‘앵콜요청금지’를 들었다. 그것도 꼭 EP 버전으로. 그래야 준비 호흡과 한숨 사이에 있던 들숨을 들을 수 있고, 이 노래처럼 풋풋했던 우리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듣는 데 그치지 않고 많이도 따라 불렀다. 가사 재창조에 능하지만 이 노래만큼은 초등학생 때 외운 ‘애국가’와 ‘독도는 우리 땅’만큼 잘 외울 수 있다.
사랑은 세계를 확장시킨다. 사랑의 대상이 있는 세계까지 궁금하게 한다. ‘앵콜요청금지’가 좋아서 대중가요를 넘어 다양한 장르를 그나마 찾아 듣기 시작했다. 인디밴드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음악 취향이라는 걸 어렴풋이 쌓아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까지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은 뭘 좀 아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냥 ‘앵콜요청금지’를 알고 브로콜리너마저를 아는 사람일 뿐이었는데…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맘이 부른다고 다시 오”지 않기에 ‘앵콜요청금지’가 좋았나 보다. 이렇게 구구절절 그때의 마음을 풀어놔도 ‘앵콜요청금지’를 처음 들었던 순간은 지났고, 그렇게 알게 된 인디밴드 CD들을 사던 음반 가게는 없어졌으며, 함께 노래를 듣고 흥얼거리던 당신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아는데 서글픈 건 어쩔 수가 없어서 한의 민족답게 노래를 듣고 또 듣고 나아가 불러보는 것이다. 하지만 ‘앵콜요청금지’이니 이 글도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