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오전 9시라는 시간이 아직 존재하는 곳이 있대.
m의 말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그게 사실이야?
나의 과한 리액션에도 m은 읽던 책을 놓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실이야. 그 시간에 y역 2번 출구 앞 스타벅스가 바글바글 하다더군.
그때부터였다. 오전 9시라는 시간이 다시금 궁금해진 것은. 오전 9시는 내가 B시에 살던 때, 그러니까 19살 때까지만 겪어본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다시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으나 어쩐 일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거리는 조용했던가. 아니, 교실 안은 소란스러웠던가. 집 안의 해는 얼마나 길게 늘어져있던가.
오전 9시에 사로잡힌 나는 매일같이 m을 꼬셨다. y역에 가자고, 가서 2번 출구 앞 스타벅스에서 ‘그 시간’을 기다리자고. m은 결국 y역에 가기 전 내게 술을 사는 것을 요구하였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이며 우리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실행 날짜는 우리의 마감 다음 날이었다. 우리는 둘 다 프리랜서였으니까.

당일 아침, 나는 이틀 동안 쪽잠을 자며 쓴 원고를 넘기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m은 내게,
-좀 자둬야 할 걸, 우린 오늘 아주 긴 시간 깨어있어야 할 테니까.
라고 충고했지만, 그녀도 어제 종일 콘티작업을 한 터라 눈 밑이 푸르스름했다. 두 프리랜서는 잠깐 낮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잠깐은 잠깐이 아니었다. 우리는 해가 지고 나서야 깨어났다. m은 깨어나서 내내 투덜거렸다.
-안 가면 안 돼? 우리 B시에서 많이 겪었잖아.
-많이 겪었지만 기억이 희미하단 말이야.
내 말에 m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따라나섰다. 우리는 간만에 나름 잘 차려입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우리 동네에서 y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숲으로 나있는 오솔길(이라고 쓰고 산길이라고 읽는다)로 걸어간 뒤 고속도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배차간격 30분의 버스를 타는 것. 프리랜서의 연봉으로는 교통편이 불편한 이런 동네에 밖에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선지 우리 동네에는 애매한 경력을 가진 예술가들이 많았다. 애매한 경력이라는 것에는 m과 나도 포함이었다. 우리는 딱히 이렇다 할 대표작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왔고, 그렇지만 어쩐지 자잘한 일들은 끊이지 않았고, 왠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 같았다.

우리는 y역에 가기 전에 h동에 들렀다. 술집과 옷가게들이 늘어선 동네였다. m은 인터넷으로 봐둔 빈티지숍이 있다며 나를 끌고 갔다. 빈티지숍엔 반짝반짝한 물건들이 한 가득이었다. m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램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더니,
-나 10일에 돈 들어오는데. 돈 좀 꿔줄래?
라고 말했고 나는 카카오페이로 약간의 돈을 이체해주었다. 우리는 램프를 전리품처럼 들고 의기양양하게 h동의 술집을 찾아 나섰다. 어느 술집이나 사람이 그득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올려 마약의 이름을 한글자만 바꾼 뮤직바를 생각해냈지만, 그곳에 당도했을 때 뮤직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고, 아니, 술집의 형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아예 흔적이 없던 것은 아니고, 애매한 헌팅포차로 바뀌어 있었다. 지친 우리는 그냥 헌팅포차에 들어가기로 했다.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룰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남자 테이블에서 이 쪽지를 보내면 천원씩 할인이 돼요. m과 나는 불후의 안주, 쏘야를 시켰다. m은 사이다에 소주를 타먹었고 나는 그냥 먹었다. 불후의 안주라고는 했지만 쏘야와 소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국물을 시킬걸. 새벽까지 쪽지는 하나도 도착하지 않았고 우리는 1퍼센트도 할인되지 않은 금액을 모두 지불한 뒤 술집을 나섰다.
-이제 뭐하지?
-노래방.
-다른 대안은?
-노래방.
단호한 m의 태도에 나는 또 기억을 더듬어 노래방을 찾아다녔지만, 몇 번 갔던 노래방도 다 다른 업종으로 변경된 뒤여서 프랜차이즈 노래방에 가야만 했다. 프랜차이즈 노래방엔 술을 팔지 않으므로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가방 안에 숨긴 것은 물론이었다. 이러다 술이 깨면 어쩌나 걱정할 즈음에 우리의 대기번호가 호명되었고 그제야 신발을 벗고 입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을 부를 때에야 우린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프랜차이즈 노래방은 서비스도 일괄적이라는 것을. 고작 10분의 서비스를 받아 마지막 1분의 클럽댄스메들리 64941번 선곡까지 전쟁처럼 해낸 뒤에 우린 나왔다. 돈을 썼는데 패잔병같은 이 느낌은 뭘까.
-이제 y역으로 가자. 슬슬 첫차도 다닐 시간이니.
m은 아까보다 더 취해보였다.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을 보며 우린 걸었다. y역에 막 도착했을 때 스타벅스는 막 오픈 중이었다. 우리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아메리카노는 따뜻했고,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고, 역시나 잠깐은 잠깐이 아니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다던 y역 2번출구 앞 스타벅스는 여전히 한산했다. 학창시절, 지각을 예감하던 불안한 고요와 정적인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다 망했어. 11시야.
나는 m을 깨웠다. m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숙취가 너무 심해.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은 도시가 아니라 우리였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며 지하철을 탔다. m은 속이 정말 안 좋은 듯 지하철이 덜컹일 때마다 울컥이는 위장을 부여잡았다. 알콜이 돌아 저린 발목을 끌고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려 배차간격 30분의 버스를 타고 오솔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m은 자신의 집까지 갈 힘이 없다고 우리 집에 와서 뻗어버렸다. 창밖은 밝았고, 우리는 암막커튼을 쳤다. 그러자 m이 외쳤다.
-아. 내 램프!
우리에게 남은 전리품은 숙취뿐이었고, 오전 9시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잠들었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