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1960)

* 영화 <기생충>(2019)의 결정적 스포일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택(송강호)네 가족이 문광(이정은)과 근세(박명훈)를 상대로 아귀다툼을 벌인 다음 날, 다시 박사장(이선균)네 집에 모인 기정(박소담)과 충숙(장혜진)은 지하실에 봉인된 이들과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모은다. “아무래도 그 분들하고 얘기를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서로가 다 좋은 쪽으로다가?” “내 말이. 어제는 씨발 다 뭐 흥분을 해 가지고.” <기생충>을 곱씹는 많은 이들은 이 장면 앞에서 탄식한다. 맛있는 음식을 들고 내려가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려 했던 여자들의 계획은 무산되고,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갈등을 묻어둔 채 회피하려 한 아비와 상대를 죽이려 한 아들이 심어 둔 폭력의 씨앗만이 싹을 틔우는 이 절망적인 결말 앞에서 탄식을 금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난 조금 다른 질문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내려가질 않았다. 충숙의 말처럼, 왜 “어제는 씨발 다 뭐 흥분을” 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충숙은 문광의 부탁을 거절하며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까지 했던 걸까?

처음 떠올린 답은 ‘박사장의 부는 자신들에게 흘러와야 할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 부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문광과 근세를 축출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기우(최우식)와 기정, 기택과 충숙까지 차례로 온 가족이 박사장네 집에 고용되는데 성공한 마당이니, 그 부가 다른 구멍으로 새지 않도록 틀어막으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론 충숙이 보여준 태도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 돈까지 챙겨주겠다며 무릎 꿇고 싹싹 비는 문광을 바라보는 충숙의 눈에는 경멸과 공포가 복잡하게 섞여 있다. 과연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난 충숙이 문광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거라 생각한다. 대만 단수이 대왕카스테라 체인점을 하다가 망하고, 그 빚에 짓눌려 허덕거리다가, 고용주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은근슬쩍 제 가족을 집 안에 숨겨 들어오는데 성공한 사람. 문광의 어제는 충숙의 오늘이다. 바로 아까까지 다혜(정지소)를 며느리로 들이네 마네 농담을 주고 받던 충숙이 발만 한 번 잘못 디디면 도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위치에 문광이 있다. 문광을 향한 충숙의 경멸과 공포는, 사실 자신들이 이제 막 벗어났다고 믿었던 계급 추락에 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기생충>의 가장 직접적인 레퍼런스였을 김기영의 <하녀>를 지배하는 공포 또한 이와 멀지 않다. 방직공장 여공들에게 합창을 가르치는 음악선생 동식(김진규)과 그의 아내(주증녀)는 근사한 신축 2층 양옥에 사는 마을 최고의 부자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단칸방에서 시작한 그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동식은 음악교습을 하고 아내는 재봉틀을 돌렸다. 그 고생을 거쳐 이제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아 올렸으니, 다리를 저는 딸 애순(이유리)의 건강만 회복하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천신만고 끝에 계급상승을 이룬 직후 악몽이 시작된다. 큰 집을 아내 혼자 관리하기 어려워서 새로 집에 들인 하녀(이은심)가, 잔잔한 수면 위에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녀는 부와 교양의 상징인 피아노를 욕망하고, 더 헤맬 필요 없게 만들어 줄 안정적인 동식의 품을 욕망하고, 태중에 생겼던 아이가 미처 살지 못한 삶을 욕망한다. 하녀의 욕망에 빌미를 준 건 동식이다. 아내가 딸 애순과 아들 창순(안성기)를 데리고 친정에 가 있던 날, 동식은 자신을 유혹하는 하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함께 욕정한다.

영화의 결말이 너무 어둡다며 상영을 거부하던 지방 극장주들을 달래기 위해 급하게 덧붙여 넣은 액자식 엔딩에서, 동식은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남자는 나이가 많을 수록 젊은 여자를 놓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도 패가망신한다고.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선생도 매한가지라고. 남자가 욕정을 다스리지 않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이 조소 가득한 엔딩을 걷어내고 나면, 김기영이 의도했던 진짜 엔딩이 나온다. 파국이 휩쓸고 간 폐허를 바라보며 탄식하던 아내가, 눈물을 닦으며 “새 집을 탐내지 않았던들 이런 일은 안 생겼을 걸.”이라 말하는 장면 말이다. 이상한 일이다. 아내는 남편이 하녀와 동침한 것이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새 집을 욕망하고 부를 욕망한 것이 시작이라 말한다. 여기에서, 김기영이 진짜 찌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진다. 간신히 가난을 딛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 아래에서 올라온 누군가가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고 그 부를 갉아먹고 가정을 파괴하며 다시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려야만 생활이 가능한 계급으로 끌고 내려가진 않을까 하는 공포, 중산층의 공포 말이다.

1960년에도 악몽이었던 그 공포는, 2019년이 되도록 극복되는 일 없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동식이 하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잃고 끌려 다니는 것도 공포 탓이다. 말이 밖으로 새서 자신의 경제적 기반인 음악 수업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 기우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산수경석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도 공포 탓이다. 자신으로 시작된 이 계급상승의 사기극을 무사히 안착시키려면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는 공포. 박사장이 자꾸만 냄새를 의식하며 기택과 선을 그으려는 것 또한 공포 탓이다. 저 빈곤의 냄새가 내 몸에도 배어 날 불쾌한 상태로 끌고 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인 공포. 누구 하나라도 그 공포를 이기고, 상대를 계급 추락의 상징 취급을 하는 대신 살아 숨쉬는 사람으로 존중하고 말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다 뭐 흥분을 해 가지고” 파국을 향해 걸어가지 않고, “서로가 다 좋은 쪽으로다가” 연대하는 방법을 배웠더라면.

<하녀>(1960)
감독
 김기영
주연 김진규, 이은심, 주증녀
시놉시스
‘동식’(김진규 분)은 아내(주증녀 분)와 다리가 불편한 딸, 그리고 아들(안성기 분)과 행복하게 살면서 방직공장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음악선생이자 작곡가이다. 또한 그는 방직공장의 여공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 ‘하녀’(이은심 분)가 들어오고 집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는 아내 몰래 가정부와 불의의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가정부는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그를 협박한다. 이렇게 한 지붕 아래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가정부 이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