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은 단지 눈의 일만은 아니어서
‘디지털 풍화’라는 말을 생각한다. 웹상의 이미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저화질이 되어 떠도는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사이트에서 사이트를 떠돌며 헐어버린 이미지들. 그 생각을 하니 얼마 전 유행했던 위챗 미니프로그램이 떠오른다. 저화질 사진을 고화질로 바꾸어 주는, 그래서 수많은 아이돌의 어린시절 사진을 복원하는 데 쓰인, 덕분에 한동안 또랑한 눈과 오동통한 볼의 어린이 사진이 인터넷에 가득하게끔 만든 스마트폰 프로그램. 그들의 얼굴을 생각하다 보면 다른 얘기가 머리를 스친다. 영화 속에서 미남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줌인되거나 화면을 향해 걸어오는 장면에서 틀림없이 후광을 보았다는, 흡사 간증 같은 관객의 후기. 그리고 그 장면은 사실 그 어떤 조명이나 CG도 없던 평범한 씬이었다는 이야기. 디지털 시대의 시각이미지란 낡지도, 변하지도, 흐릿해지지도 않을 것 같은데, 뜻밖에도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어떤 것은 영문도 모르게 이미 달라졌고 어떤 것은 의도적으로 변화한다. 결국 여전히 픽셀과 픽셀, 컷과 컷을 대조하는 대신에 육안과 기억에 의지해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들이 많다. 그뿐일까.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보는 것은 같은 것 같아도 실은 같지가 않고, 나와 내 옆의 저 사람이 보는 것이 같은지도 알 수가 없다. 본다는 건 그렇게 이상하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배반하듯 불확실하고, 보는 주체를 철저하게 개입시키는 일이다.
<보는 데에 눈을 쓰지 않는다면 우는 데 쓰게 될 거야>는 지난 5월 26일까지 상하이 와이탄미술관에서 열렸던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개인전 제목이다. 상하이 도심의 근대식 석조건물을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는 이 미술관은 전시 기간 동안 공간 전체를 레베르거에게 내주었다. 매 층엔 상이한 감촉의 작품이 자리한다. 관객은 층층이 다른 풍경을 마주하면서 그 나름의 시도로 작품을 ‘본다’. 관객은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크기와 층위의 네온 조형물로 채워진 공간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빛의 변화를 관찰할 수도 있고, 전시장 가운데에 마련된 간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물을 내린 후에 (꼭 같은 물을 쓴 것처럼 마침맞게 우려진) 차 한 잔을 받을 수도 있으며, 그 차를 들고 나갈 수도 다실에 들어가 앉아 마실 수도 있다. 누군가는 거기서 구역질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다다미방 버전의 <중경삼림> 에 들어온 기분이 좋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층에서는 또다른 층위의 ‘개입하며 보기’가 이루어진다. 2층에는 크기, 형태, 재질, 색상 등이 제각각인 조형물에 저마다 꽃이 꽂혀 있다. 레지스 드브레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야기하던, 무덤이자 장례이자 죽음을 뒤따르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상실과 죽음의 꼬리를 물고 끝없이 최후를 지연하는 이미지의 역할은 시들어가는 꽃을 내버려두는 이 공간에서 비틀리는 듯 보이지만, 미술관을 찾은 관객의 자발적 의지로 인해 예기치 못하게 지켜진다. 생생한 꽃이 전시품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도 관객의 인스타그램 사진으로서는 남는다는 의미에서다. 원본과는 다른 자아가 묻은 이미지가 수장고에 보관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1층과 옥상은 식육점과 바bar로 연결되어 배니타스 정물화와 상하이라는 공간적 배경, 먹고 마시는 행위를 느슨하게 연결하고, 작가뿐만이 아니라 바텐더와 정육업자를 전시의 내부자로 끌어들인다. ‘본다’는 행위이자, 상태이자, 감각이자, 선언을 광대한 주제 삼은 옴니버스의 층계참은 결국 ‘내가 볼 때’로 시작하는, 전체 전시를 아우르는 총체적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이런저런 전시 사이에서 이 전시를 꺼내어 일기장에 적어두는 건, 전시를 보던 중 들었던 생각 때문이다. 전시가 전시여서 생기는 것들이 좋다는 생각. 자그만하게 말하면은 묘미랄 수 있겠고 장대한 표현을 쓰면 마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들. 당연한 소리겠지만은 전시란 단순히 하나 또는 여러 작품을 같은 공간에 두는 것 이상의 무언가이기 마련이다.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작품과 동일선상에 있을 수도, 새로운 맥락을 읊을 수도 있고, 의미를 풍성하게 확장할 수도 첨예하게 벼려낼 수도 있다. 전시가 놓인 시공간과 관계 맺으며 또다른 이야깃감과 감흥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보는 데에 눈을 쓰지 않는다면 우는 데 쓰게 될 거야>는 새삼 그 사실을 상기하게 만드는 전시였다. 얼마나 볼 것인지, 볼 수 있는지, 보고 싶은지. 실은 전시라는 것 자체가 그 질문들에 대한 제안이 아닐까.
*
실은 울며 보는 것도 좋아한다.
》
기간 2019. 3. 23 ~ 2019. 5. 26
장소 상하이 와이탄미술관Shanghai Rockbund Art Museum
출처 – 상하이 와이탄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rockbundartmuseum.org/
1 comment
저는 요 님이 잠깐 본 것,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보며 생각한 것, 애정을 두고 본 것, 분명 평범한 것이지만 요 님만의 언어로 새롭게 재구성한 것 등등등을 길고 짧게 쓰신 글들이 너무 좋아요.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