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가까스로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기 전, 그녀는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뉴욕과 보스턴, 워싱턴과 필라델피아 같은 이름을 지닌 도시들의 경계를 넘나들며 날아다녔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근사한 꿈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뒤통수를 좇으며 창공을 날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 꿈속에서 하늘을 날았을 때와 달리 설레고 짜릿하기보다는 뺨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대기에 고통스러웠고 무엇보다 앞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날갯짓을 정신없이 하느라 팔이 떨어져나갈 듯 어깨가 아팠다.
피곤한 꿈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12월의 어느 새벽이었고, 밖은 아직 캄캄했다. 일어날 시간이 아닌 한밤중이나 새벽에 눈을 뜨는 것은 그녀에겐 일상적인 일이었다. 불면은 그녀의 오랜 친구였으니까.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그녀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고 어쩌다가 일찍 잠에 드는 밤에도 얕은 잠을 자다가 작은 기척에 몇 번이고 눈을 떴으니까. 그런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 누워, 눈을 질끈 감고 잠이 다시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린 시절, 이렇게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 누워 있을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은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혹은 새벽, 어둠 속에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는 기괴할 만큼 커다랗게 들렸고,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얼른 자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잠이 오는 걸까,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또 깨어버린 걸까? 그녀는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집이 너무 추운 탓인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뒹굴 몸을 한쪽으로 굴렸다. 보일러의 온도를 좀 더 높일 걸 그랬나? 하지만 난방비는 너무 비쌌고, 그 돈을 벌려면 더 많은 모욕과 수치를 견뎌야 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어깨가 아프더라도 웅크리고 덜덜 떨며 자는 편이 나았다. 사장은 툭하면 소리를 질렀고, 여자들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서 일을 못한다고 소리를 질렀고, 회식 때마다 여직원들을 늙고 배 나온 남자 간부들 사이에 하나씩 앉혔다.
잠을 청하려 눈을 다시 감았지만 그녀는 애를 쓸수록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과 머리가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무거워 아직 일어날 수 없는데 잠은 멀리멀리, 손을 아무리 뻗어도 거머쥘 수 없는 곳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또 실패인가? 그녀는 절망스러운 마음에 눈을 다시 떴다. 사방은 어둡고, 방은 여전히 차가웠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윽고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불면의 전문가답게 그녀는 테두리만 보이는 사물들의 형태를, 그녀를 둘러싼 어둠의 색조와 질감을 분간할 수 있었다. 어떤 어둠은 공포를, 분노를, 때로는 낭만을 증폭시켰지만, 그 새벽의 어둠에는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을, 우울을, 멜랑콜리를 건드리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오래전 땅거미가 진 골목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엄마가 퇴근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날들을 떠올렸다. 아직 동생은 태어나지 않았고, 어린 그녀가 골목 어귀 구멍가게의 평상에 앉아 엄마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날들을.
엄마가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하며 혼냈겠지만 이내 환히 웃어주었겠지, 피로한 얼굴을 감추고, 환하게.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아무리 고단하고 추운 날에도 우리를 잠깐이나마 웃게 하는 거니까, 꽃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거니까. 그녀는 뒹굴, 몸을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굴리며 이런 생각을 그만해야 하는데, 내일 출근하려면, 이렇게 못 자면 내일 업무에 차질이 있을 텐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틀림없이 김 부장은, 송양, 송양은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밤에 뭘 하고 다니길래 매일 졸아, 밤마다 할 일이 아주 많은가봐, 하며 징그럽게 웃을 테고, 나는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바보처럼 웃는 내 자신이 싫어질 텐데, 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자책을 할 텐데. 하지만 잠은 아무래도 오지 않았고, 어쩐지 창밖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고, 공기가 점점 더 차가워지는 느낌을 들었다.
얼어붙겠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에는 자다 깨면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있었고, 조금 큰 이후에는 동생이,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영수가 간간이 잠꼬대를 하거나 거친 숨을 이따금씩 몰아쉬며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둠 속에 홀로 누운 그녀의 집에는 얼마 전 길가에서 구조한 후 주인을 찾지 못해 뜻하지 않게 같이 살고 있는 늙은 개 한 마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고, 들리는 것은 밖의 바람 부는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자동차 바퀴 소리뿐이었다. 내겐 아무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녀는 부주의한 말들과 의도치 않았던 행동 탓에 자신이 망쳐버린 관계들을 떠올렸다. 빙하가 녹은 탓에 갈수록 세계는 추워진다던데. 그녀는 애정을 품었던 모든 것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홀로 멀리 멀리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북극지방에서 떨어져 나온 빙하를 타고 어딘가로 한참을 떠내려가던 그녀의 얼어붙은 코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지? 그것은 물컹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어느 새 얼굴 앞까지 다가와 있는 늙은 개 한 마리였다. 며칠째 방 밖에서만 자던 개. 그녀에게 아직 아무 의미도 아니던 개. 버림받은 동물답게 그녀의 눈치만을 보며 퇴근한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개. 그 개가 어느 틈에 침대에 올라왔는지 꼬리를 흔들며 그녀의 코를 한 번 더 핥았다.
“아이, 이러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렸다. 개는 그녀가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꼬리를 흔들며 더욱 적극적으로 코를 들이밀었다.
따뜻한 혀, 축축한 코, 부드러운 털.
“그만 좀 해, 그만.”
내일에 대한 전망은 비관과 회의 사이를 오가고, 다음 달 난방비 고지서마저 여전히 근심스러운 새벽이었다. 나는 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개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며. 뭘 기다리는 걸까?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나의 미숙함 탓에 이번엔 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두려웠다. 하지만 밖이 너무 추웠으므로 그녀는 혼자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의 끝자락을 가만히 열었다. 그녀의 온기 쪽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러자 이제 곧 그녀에게 부드럽고 다정한 것, 손익 계산되지 않는 온기와 대책 없는 연약함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될 개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이른 새벽. 팔에 기댄 개의 체온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녀는 팔에 닿는 작은 심장 고동을 느끼며 마침내 단잠에 빠져들었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