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 표시가 없는 지도를 따라 (4 AM)
깨어난다면, 나는 네 생각을 할 거야. 깨어나지 않는다면,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 생각을 하고 싶어질 거야. 하고, 싶어질 거야. 그게 뭐가 되었든, 뭐든, 너와 하고 싶어질 테고, 그게 뭐가 되었든 나는 할 수 없을 거야.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는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가 헤어졌는데, 하필이면 길을 헤매던 중에 헤어져서, 나는 아직까지도 우리가 어디서 헤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원래 우리는 영월에 가려고 했었고, 영월에 가다보니, 영월이 아닌 곳에 와있었다. 영월에는 별을 볼 수 있는 천문대가 있었고, 별을 볼 수 없는 동굴도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서 별을 보거나 별을 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월에 못 가서 아무것도 못 보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내비게이션을 믿어도 너무 믿은 탓인 것 같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나를 믿어도 너무 믿은 탓인 것 같기도 했는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또 다시 생각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월에 가려다가 영월이 아닌 곳에 갈 수도 있었다. 나는 영월이 아닌 곳도 괜찮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너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영월에 가려고 했고, 가려고 했지만, 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너는 혼자서 갈 수 없었다. 너는 우리가 영월에 가지 못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했다. 길치인 내가 운전을 한 탓이라고 했다. 나는 면허가 없는 네 탓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탓했는데, 서로를 탓했기 때문에 우리가 헤어졌던 건 아니었다. 헤어진 후, 나는 헤어진 이유, 뭐 그런 걸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들지 않았다면, 나는 또 네 생각을 했을 것이다. 네 생각을 했다면, 분명 나는 네가 보고 싶어졌을 것이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너는 지금 이태원을 걷고 있을 것이다. 너는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고, 너와 함께 걷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서, 나는 조금 슬프지만, 슬퍼하면서도 울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이태원에 없을 것이다. 너는 그와 함께 어수선한 거리를 걷다가, 술에 취해 말다툼을 하는 연인을 지나쳐, 익숙한 술집으로 있는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고,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내 생각을 했을 것이며, 내 생각을 하다가 그 술집이 망하길 바랐을 것이다. 바라지 않았어도, 그 술집은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너는 그와 낯선 술집으로 간다. 잠시 후,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쪽으로 남산이 솟아있는 곳에서 너는 취해 있을 것이다. 그곳에 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 네가 있지 않다면, 너는 종로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네가 기다리는 사람은 내가 아닐 것이다. 너는 네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다. 잠시 후, 남쪽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북쪽으로 고궁이 서있는 곳에서 너는 웃게 될 것이다. 그곳에 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곳에 너도 없다면, 너는 회사에서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이미 퇴근했다면, 당산철교를 건너는 지하철 안에서 한강을 바라보거나, 양화대교를 건너는 택시 안에서 선유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면, 너는 집 앞 골목에서 길고양이와 마주쳤을 것이다. 귀여운 길고양이를 보며, 귀엽지 않은 나를 떠올리진 않았을 것이다. 너는 누군가를 생각할 것이다. 너는 그와 함께 코인 노래방에 가려다가 가지 않을 것이고, 영화를 보러 코엑스에 갔다가 길을 잃을 것이다. 아직 길을 잃지 않았다면, 너는 그와 함께 고궁을 산책하며 박석을 밟고 있거나, 삼청동 카페에서 드립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너는 나와 함께 갔거나 가지 못했던 곳에 있고, 너는 내가 없는 곳에서 행복해진다. 나는 잠을 자는 중이니까, 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고 있고, 너는 사방에 있다. 네가 사방에 있을 때, 사방에는 네가 있다. 너는 어디든 있고, 어디든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다. 모를 때, 너는 사방에 있다. 동 서 남 북. 만약 우리가 함께 늙어간다면, 하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만약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만약에 있을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너에게 말한 적은 있었다. 말이 어긋난 후로, 너는 내게 만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는 더 이상 내게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도 말을 하고 싶었다. 만약 내가 억지로 말을 이어나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억지로 관계를 지속시키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여행을 가보는 건 어떠냐고 너에게 묻지 않았다면, 네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우리가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니, 여행을 갔더라도 영월에 무사히 도착했더라면,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었더라면,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내가 조금 더 상냥하게 말했더라면, 네가 내게 무슨 말이라도 했더라면,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그날 네가 택시를 잡아타지 않았더라면, 기사님이 서울까지는 안 간다고 말했더라면, 내가 너를 붙잡았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늦게라도 영월에 갔더라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 끊어지고. 영원히 사랑할 수 없더라도, 영월까지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끝내 영월에 가지 못했다. 영월에 함께 가자고 했던 건 나인데, 정작 영월에 함께 가려고 했던 건 너였다. 내가 영월이 아닌 곳에서 영월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월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다시 말이 끊어지고. 갈 수 없다. 혼자, 도무지, 이어나갈 수 없다. 기운 없어지고, 기운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잠을 자고 있다. 깨어난다면, 나는 네 생각을 할 거야. 좀 더 생각한다면, 나는 우리가 어디서 헤어진 건지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와 만약을 생각하는 나는 방위를 모르고, 몇 시인지를 모르고,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아는 것도 없이, 끊임없이, 잠을 자는 중이었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
8 comments
서이제 작가님 너무 팬이에요!
짧은 소설이지만 작가님만의
색이 느껴져서 너무 좋네요👀👍🏻💕
선잠처럼 느껴져요. 너무 좋네요. 원래 팬이었지만 더욱 팬 되었어요. “~했더라면” 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이 특히 좋네요.. 파도가 막 밀려오는거같구 ㅠㅠ 울컥했어요 ㅠㅠ
“귀여운 길고양이를 보며, 귀엽지 않은 나를 떠올리진 않았을 것이다.” 문장 너무 귀여운거 아닌가요… 서이제 작가님 짱짱 계속 많이많이 서주세요!!!
와 이제 작가님, 더 많이 보고싶어요 팬 되었어요 ♥️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응원 할게요!
깔끔하면서 쌉싸름하고 달달한 그린티라떼 마신기분이에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써주세요!!!
지루하다
작가님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부탁드려요🥰
서작가님의 글은 많은 역설적 문장 속에서 더 많은 역설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것이 글을 읽을 때마다 요동치는 심장을 붙잡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는 생존한다’ 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순간을 부여해줌으로 글자 하나 하나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덕분에 활기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