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숲속에서 바다를 보았다
미지의 것에 관심이 많다. 알 수 없는 시공간의 우주. 선명한 태양 아래서는 사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 몇만 광년 너머 별빛이 반짝이면 신비에 사로잡힌다. 거대한 우주적 공상에 빠지다 보면 티끌보다 작은 존재에 냉소를 품게 된다.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지만 기껏해야 밤하늘을 좋아할 뿐인 내가 감당할 만한 주제도 철학도 아니다. 한편 또 다른 취향이 있는데,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긴 암석을 좋아한다. 가끔 뒷산을 산책할 때 굳건한 바위를 어루만져 본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을까? 이 정도면 애니미즘인가 싶다. 얼마 전엔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몇백만 년 전 석기 도구에 새겨진 인류의 역사가 한없이 흥미로웠다. 이 또한 미지의 영역이지만 확실히 우주보단 구체적이다.
2012년 발매된 정태춘·박은옥의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수록곡 ‘저녁 숲 고래여’는 나를 울산만 근처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서게 하였다. 한국 사회 산업의 엔진이며 역동적인 노동자의 도시에 고래가 살았다니,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도시기에 그제야 비로소 울산의 지형이 들어왔다. 아, 그곳에 바다가 있었구나! 정확하게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시 옆에 울주군에 있다. 고대의 문명을 찾아가는 길은 흥분이 동반되는 작은 모험과도 같았다. ‘저녁 숲 고래여’를 들으며 흠모하는 아티스트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에 묘한 만족감도 가지며 지도를 보았다.
암각화까진 깊은 산길을 걸어야 한다. 가는 길에 대곡천이 흐르고 있지만 바다를 상상하기엔 메말랐다. 바다는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비로소 노래의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어, 그 배를 볼 수가 없군요 / 아 어린 고래여, 나의 하얀 고래여 / 우리 너무 늦게 도착했나 / 어기야 디야, 깊고 푸른 바다 / 어기야, 그 백척간두…”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먼 세기엔 더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단다. 대곡천과 이어진 태화강 유역은 육지와 해상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선사문화를 꽃피웠다. 노랫말에 이끌려 나선 길 위에서 선사인의 구체적인 삶을 만났다. 암각화의 규모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다만 무수한 세월만큼 퇴화의 흔적이 컸다. 고래뿐 아니라 사슴, 호랑이, 거북, 새와 사람의 형상이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예술성은 놀라웠다. 게다가 반구대엔 알타미라 동굴에도 없는 고래가 있단 말이다. 고래 그림 중 절대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 고래의 이미지다. 선사인에게 고래의 모성이 어떤 각별함으로 주었을까? 그 생활과 시선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며, 나는 그렇게 정태춘의 노래와 함께 저녁 숲속에서 바다를 보았고 시원의 시간을 여행했다.
올해는 정태춘·박은옥 음악 인생이 40주년을 맞는 해이다. ‘시인의 마을’의 청량함에 반했지만 ‘떠나가는 배’의 장중함은 왠지 부담스러웠다. 박은옥의 ‘윙윙윙’을 성대 모사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의 평범한 경험 속에서도 그들은 인기 가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들이 시대의 투사가 되었다. 학교에선 일부 교사들이 ‘우리들의 죽음’을 틀어주며 불편한 사회의 이면을 말해주었다. 심의와 충돌하며 표현의 자유 운동을 전개했고 마침내 음반사에서 건전가요를 걷어냈다. 정태춘의 음악엔 언제나 구체적인 시대정신이 새겨져 있다. 광장에서 들었던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는 정말로 나를 새로운 시대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평택 대추리 싸움에 이후 정태춘은 진보의 위악에 상처 입고 한때 칩거했다. ‘저녁 숲 고래여’가 수록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은 오랜 침묵을 깨뜨린 반가운 음반이었다. 음반엔 여지없이 그간의 고민이 담겨있었다. 40주년을 맞아 같은 음반에 곡 “날자, 오리배”라는 타이틀의 전국 투어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벌써 매진이 속출한다고 한다. 40주년의 시간이 누적된 정태춘·박은옥의 음악에서 몽상과도 같았던 그들의 미지의 세계를 함께 여행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