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이 스민 햇빛
실수를 실패라고 단정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티끌처럼 사소한 것들에도 번번이 마음을 다치게 된다. 사실은 별 일 아닌데. 그리고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는 건데 그게 잘 안 된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미 벌어진 장면으로 수없이 플래시백을 하며 되뇌는 혼잣말. have to 문법에 충실한 문장들은 조건반사적으로 붙어버리고 만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그 질펀한 후회들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술수일 수 있다. 자책을 빌미로 꺼내드는 길티 플래져 같은. 그럴 거면 그냥 즐기고 말지 싶지만, 조금의 죄책감이 포슬포슬 양념처럼 배여 있어야 그야말로 길티 플래져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다가 이별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내게 그는 길티 플래져였어. 물론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고 해서 내가 그를 만나지 않을 건 또 아니지. 그렇게 실수처럼 여기고 마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 속에 오래, 머무르려고 기를 쓰다 보면 이게 실수인 건지 실패인 건지, 기실 내 인생은 점점 실패로 수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이 과정은 멈추지 않고 반복하기를 일쑤. 그렇게, 짝짝짝! 개 같은 내 인생! 하며 자조하게 되는 것이다.
리킷은 그 과정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일상으로 풀어낸다. 어느 대낮, 나도 모르게 멍해지고 마는 그 순간을 캡처한 것만 같은 영상들은 도돌이표처럼 전시장 곳곳에 산란해 있다. 의도한 그림자는 빛의 연출을 통해 공간에 자욱하게 드리운다. 갖가지 영상 작업들이 가변적으로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척 스펙타클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성에가 뽀득뽀득 낀 창문, 실내를 가득 채우는 근사한 햇빛, 빛을 타고 유영하는 작은 먼지들. 그가 캡처한 장면들은 우리가 여느 보통의 하루를 겪어내면서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일상적인 아름다움 속에 또박또박 입힌 자막에는 죄책감, 정신, 죽음 같은 무거운 단어들이 주저 없이 등장한다. 산뜻한 경음악이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영상, 그 기이한 밝음을 보면서 나는 의도치 않게 나의 잘못들을 떠올렸다. 어떤 잘못? 실패라고 덮어버리고 다시는 들춰보지 않았던 과거의 실수들을. 누구나 다들 한 번쯤은 해보았던, 그래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러한 실수들을 실패라고 단정했던 게 가장 잘못이 아니었나. 우린 다 이 정도의 죄책감은 갖고 살지 않나 싶은.
매일 느끼는 경험과 감정을 소재로 다양한 일상 집기들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하는 홍콩 출신 작가 리킷의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 선보인 작품들에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늘 보던 익숙한 장면들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작은 균열을 통해 관객들은 저마다 고유한 자신의 감정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감정의 폭은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그 찝찝하고 질펀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그 감정들을 전부 겪어내고 나면, 결국에는 우리 모두 다음 장면으로 건너가야만 한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뱉어버리고 만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다고 더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후회를 밥 먹듯이 하는 것처럼. 이 기이한 반복의 과정은 햇빛이 들고 지는 것과 같이 연거푸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와 오늘의 대낮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