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freeze(2010), 검정치마

물이 물이기 위해서는 유지해야 하는 온도가 있다. 섭씨 100도를 넘으면 기체가 되고, 0도를 내려가면 고체가 되어 물로 존재할 수 없다. 나도 물과 같이, 나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온도가 있다. 나의 불행은 끓는점이 낮아서 쉽게 끓어 버리는 것이었다. 끓어서 사라질까 봐, 내가 너무 뜨거워서 남이 다칠까 봐, 자꾸 뜨거워지는 나를 식히려고 얼마나 노래를 듣고 또 불러댔는지 모른다. 길가에 흘러나오는 노래랑 눈빛만 마주쳐도 노래방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고백할 게 있는데, 요즘 나의 고민은 나의 온도가 어는점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너무 뜨거워져서 고민이던 내가 이제는 차가워져서 고민하다니 정말 온도를 유지하는 것은 평생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차가워지니까 노래도 잘 안 듣게 되고, 그 좋아하던 노래방도 안 가게 됐다. 이게 왜 고민이냐면 나의 동력은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뜨거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즘 나는 동력을 잃었다. 그 많았던 나의 노래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또 다른 이의 가슴에서 살고 있겠지. 다시 나의 노래를 찾기 위해 얼고 싶지 않다. 다시 나의 온도를 찾아서 힘차게 움직이고 싶다.

이런 바람에서 검정치마의 ‘Antifreeze’는 요즘 나의 주문과도 같은 노래다. ‘Antifreeze’의 뜻은 ‘부동액’인데, 제목대로 나의 냉각수가 얼지 않도록 해주는 부동액이 되어주고 있다. 노래를 진짜로 만나게 되는 타이밍은 따로 있다. 늘 들어오던 노래라도 가슴을 때리는 것은 그 노래를 알고 몇 년 후일 때도 있는데, 그게 그 노래를 진짜로 만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도 그런 경우인데, 그전에도 알고 있다가 진짜로 만나게 된 건 3년 전 노래방에서였다. 어떤 무리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는데, 그 무리 중에는 남편도 있었다. 그때는 감독인 우리 부부 둘 다 영화를 찍기 전이어서 지금보다 벌이가 훨씬 더 시원찮았다. 서양 속담에 ‘가난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행복은 대문으로 도망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그랬다. 그 시절 우리는 사소한 것으로도 많이 싸워서 지쳐 있었다. 가난한 주제에 글을 쓰겠다고 커피숍을 매일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원망했으니 이해심이 씨가 마른 시기란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안팎으로 힘들던 그 시절, 노래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남편이 노래방에서 술에 취해 이 노래를 불렀다. 남편은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부른 듯 했지만, 가사를 중심으로 노래를 듣는 나는 노래방 모니터에 뜨는 가사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박혀 왔다.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라고 외치는 노래 가사에 얼어있던 마음이 물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혹한기를 둘이 함께 춤을 추며 견뎌보자’ 하는 용기가 모두가 취해 허우적대던 허름한 노래방에서 생겨났다. 아마 남편은 모를 것이다. 노래방에서 술 취해 생각 없이 부르던 이 노래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줬는지. 그때를 떠올리며 추울 때마다, 이 히터 같은 노래를 꺼내 마음을 녹이고 있다는 것도.

물의 어는점을 낮춰주는 게 전해질이다. 전해질의 대표적인 물질은 소금인데, 소금이 물에 섞이면 전류를 통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어는점을 낮춰준다. 그래서 사랑은 전해질이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 얼지 않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마침 지금도 겨울이다. 눈 대신 미세먼지가 날리는 더러운 겨울. 지저분하고 춥지만 ‘Antifreeze’를 불러본다. 이 부동액 같은 노래가 어는점을 낮추길. 그래서 얼지 않기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