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만큼 보고 싶어서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그러니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나는 국내 여성 소설가들의 단편집과 국내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노래를 들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은희경과 정이현, 천운영과 김애란의 소설들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간식 먹듯 꺼내 읽었고 교복 재킷 속에 이어폰을 숨겨 손바닥 쪽으로 향해 꺼낸 뒤 귀에 가져다 댄 자세를 수업 시간 내내 유지했다.
음악을 할 것도 아니었으면서 라디오와 MP3로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노래를 열심히도 듣기 위해서였다. 늘 한 쪽으로 고개가 삐딱해진 상태로 청취의 상황을 위장하기 위해 교실 칠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선생님 보시기엔 굉장히 집중하는 학생으로 보였을 텐데 죄송하다. 아니다. 가사 외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스트리밍 차트 같은 게 있었으면 내가 꽤 유용한 리스너일 수도 있었을 텐데 좀 아쉽다. 매점에 달려가는 마음처럼 쉬는 시간 십 분 동안 다급하게 읽어 내려갔던 그때의 소설 속에는 내가 모르는 어른들의 밤과 취향이 도처에 있었다. 던힐을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혼자로 남겨지는 예술가들의 시간표 없는 하루들과 좀 더 근미래인 불 꺼지지 않는 편의점과 혼자만의 방의 공포와 안도가 이상한 배합으로 서려 있었다. 매일을 학교와 학원을 오가던 내게 저들의 방황 같은 밤은 어떤 판타지로 기능했다. 그리고 그 판타지 같은 여정의 사운드트랙으로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노래가 귓가를 쟁쟁 울리곤 했다. 지금은 계보조차 희미해진 여성 보컬 그룹의 노래들이 늘 당시 플레이리스트의 꼭대기부터 마지막까지 있었다.
지금도 여러 뮤지션들이 리메이크를 하는 히트곡 ‘행복한 나를’을 불렀던 3인조 여성 보컬 그룹 에코의 노래들은 한국형 발라드의 어떤 정수를 강렬한 보컬의 조합으로 완성하며 큰 인기를 모았다. ‘행복한 나를’을 비롯해 ‘마지막 사랑’, ‘그대도 내게도’ 같은 곡들 역시 청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의 에코가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 측면에서 강수지 같았다면 내가 사랑한 그룹 이뉴는 뭐랄까 인지도를 선점한 에코와 비교하자면 약간 하수빈의 롤이었다. 에코가 뭘 해도 잘 해내는 첫째 같았다면 이뉴는 열심히 연습한 장기 자랑에서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돌아온 둘째 같았다. 맘이 많이 쓰였다. 그렇다고 내가 에코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했다. 참사랑이었다. 웬만한 노래는 지금도 외워 부른다.
다만 1집을 발표한 후 홀연히 사라진 이뉴가 여전히 내게 아름답고 아픈 손가락이어서 그렇다. 에코의 노래들이 ‘왜 내게서 멀어졌냐고 난 정말 원치 않았던 이별이었다고’의 정조로 이별 후의 애상을 서럽고 웅장하게 그려냈다면 이뉴는 좀 독특했다. 데뷔 시절 한국의 TLC라고 불릴 정도로 정통 리듬 앤 블루스를 팀의 컬러로 삼았던 이들의 데뷔 타이틀 ‘독립선언’은 가사부터 파격적이었다.
‘딴생각을 하지 마 다른 날 찾으려 하지 마 갔어 때는 이미 지나갔어 니가 없이 이렇게 저렇게 좋은 때는 갔어 그러므로 이 노래도 끝이 났어’라고 마무리 짓는 이 노래는 마마무나 블랙핑크의 걸크러시 컨셉을 이미 20년 전에 선보인 곡이었다. 화이트 슈트 차림에 매니쉬한 메이크업으로 무대를 말 그대로 건들거리던 이뉴의 모습은 충격적으로 좋았다. CD를 몇 번이나 돌려 들으면서 흥얼거리던 ‘독립선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게 좋아했던 노래는 ‘헤어진 만큼’이라는 발라드다. 차분하고 단정하게 멜로디를 쌓아가는 이 곡은 이뉴라는 보컬 그룹의 개성과 진가를 보여주는 곡이다. 굉장히 전형적인 한국형 발라드 같지만, 클라이맥스에서 야심을 과시하지 않는 보컬의 합은 ‘헤어진 만큼’이란 곡이 가진 이별의 정조를 더욱 애틋하게 전달한다. ‘이미 알고 있어 눈을 뜨고 나면 텅 빈 방에 혼자라는 걸’이라는 가사로 시작해 ‘남겨진 나를 걱정하지 마 돌아올 그날 위해 울지 않을래 멀리 있어도 아주 가까이 그리움은 사랑으로 변해가겠지 너무 사랑하나 봐’라는 절절한 가사로 끝나는 이 노래는 이상하게도 물기가 적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는 듣는 것 보다 부르는 게 훨씬 슬픈 곡이다. 회식 자리 같은 데서 아무도 모르는 이 노래를 부르다 운 적이 몇 번 있는데 그건 뭐랄까 임재범의 ‘고해’나 김형중의 ‘그녀가 웃잖아’를 부르며 우는 것과는 또 다른 고립의 슬픔, 오롯이 내 슬픔 이기도 하다. 갑자기 20년 전을 추억하며 집에 있는 이뉴의 단 하나뿐인 1집 앨범 CD 를 향기 나는 물티슈로 닦아 드려야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