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느낌
덥다. 기록적인 폭염이다. 대피할 만한 볕이다. 요즘 같을 때는 하던 일과 해야 할 일을 뒤로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계곡으로 가서 시원한 물에 몸을 담갔다가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몸을 말리고, 고기를 구워 먹고, 수박이나 깨 먹고, 다시 물놀이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고 한숨 자다 철수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런 생각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대단한 여름의 일이다.
여름의 일들을 떠올리면 여름 음식이나 여름 여행이나 여름 놀이 같은 게 연쇄적으로 떠오른다. 모두 ‘쿨’한 것들이다. 자기 자신을 수영하고 몸을 말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시원시원한 여름의 인간도 있고, 나는 물에서 놀 때만 저절로 튀어나오는 ‘여름의 웃음’을 가지고 있다. 그 웃음은 사시사철 내 안에 있는 웃음이지만, 여름의 나에게서만 풍겨 나오는 제철의 웃음이기도 하다. 여름의 순정만화, 여름의 드라마, 여름의 OST는 어떤가. 여름에는 자연히 청량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펼쳐지고 닫힌다.
어느 여름에 교우했던 한 소년이 홀연히 떠오른다. 지금은 소식이 끊겼으나, 그는 여전히 선한 성품으로 누군가의 안위를 챙기는 어른이 되어 있을 테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종종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소읍을 한 바퀴 돌곤 했는데, 어스름하게 저녁 빛이 돌면 자전거를 끌고 그의 집으로 가서 설익은 포도를 나눠 먹곤 했다. 그의 집 마당에 있던 포도나무에서 직접 딴 것이었다. 땀에 젖은 티셔츠를 입고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다가 잠이 들어서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홀로 집으로 되돌아오던 때도 있었다. 그 밤, 그 공기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쁨을 확연하게 해주곤 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 하룻밤만 지나면 학교에서 볼 수 있을 텐데, 삐삐 음성사서함에 괜히 여름 노래를 녹음하곤 했다. 나는 그때부터 여름밤의 공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첫 느낌’은 여름의 것이어야 옳다. 괜히 그런 것 같다. ‘마지막 느낌’이 겨울의 것이어야 하듯. 여름에는 누구나 새로운 사람이고자 하고, 겨울에 많은 이들은 마지막에 남겨지는 사람이길 꿈꾼다.
요즘 같은 날씨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습기를 약하게 머금은 채로 신선했던 밤공기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여름 앨범 중 하나가 드라마《느낌》의 OST다. 김민종, 손지창이 ‘더 블루’라는 이름의 듀오를 결성하고 부른 <그대와 함께>가 수록된 바로 그 앨범이다. 1994년에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느낌》은 여름, 청춘, 드라마 그 자체였다. 미술을 전공하는 자상한 맏형 빈(손지창), 여자에게 무관심한 냉철한 모범생 둘째 현(김민종), 조정선수이며 상남자인 막내 준(이정재) 그리고 이 삼 형제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긴 생머리에 크고 환한 웃음과 슬픔을 함께 가진 유리(우희진). 주인공들의 캐릭터 설명만으로도 이미 여름의 느낌적인 느낌이 촉촉하다. 그 촉촉한 순정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삼 형제가 아니라 형제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유리에게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유리와 준이 사실은 남매였다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가운데 좌절하곤 했다. 준은 유리의 것, 유리는 준의 것이라고 여겼다. 눈가가 ‘사랑 느낌’으로 촉촉해졌다. 나와 자전거를 타던 이는 준보다는 빈이나 현에 더 가까운 이였는데도 역시 그랬다. 어떤 드라마나 어떤 앨범, 어떤 노래는 그 자체로 인생의 어느 한때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한 계절을 기억하게 한다. ‘그대와 함께, 별을 잃어버린 소년, 오늘은 정말, 그대 없이는, 느낌(Main Theme), 아마 그건, 너는?, 느낌(Humming)’이 수록된 이 앨범은 어쩌면 내가 지금껏 기억하는 가장 긴 여름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그대와 함께>의 그 짧고 강렬한 전주가 흘러나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여름을 현재처럼 살아 보곤 한다. 그때마다 새삼 깨닫게 되는 바는 내가, 우리가 이제 정말 여름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 잃어버린 여름을 찾아서 당신은 지금 어떤 ‘옛날’을 헤매고 있나요? 당신이 간직하고 있을 가장 길거나 가장 짧은 여름의 이름이 슬며시 궁금해진다. 이 역시 여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