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다운 피해자’ 같은 건 없다
“안젤라 일에 관해서는 마을 사람 모두가 당신 편이예요. 하지만 광고판에 관해서는 아무도 당신 편이 아니예요.”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게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비난하는 광고판을 내릴 것을 설득하러 온 몽고메리 신부(닉 시어시)의 말에서 난 기시감을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반복해서 들어온 목소리들과 그 논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정부에 책임을 묻는 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 아버지가 혼수상태인데 시댁 식구들과 여행을 다녀오다니 진정성이 의심된다. 탄압과 혐오를 당하는 건 안 됐지만 그걸 요란스럽게 퍼레이드를 하면서 외쳐야 하냐. 합리와 이성을 가장해 침묵을 강요하던 이 말들 뒤엔 꼭 이 한 마디가 따라 붙었다. 돕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태도를 보면 그 마음이 싹 가신다고.
이들에 따르면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무결해야 하고 공격적으로 굴어선 안 된다. 오로지 비탄에 젖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일도 벌이고 있지 않아야 비로소 제 동정과 연대를 받을 자격을 얻는다. 모두가 피해자의 진정성을 심사하는 판관 놀이를 하는 분위기를,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온 몸으로 박살낸다. 경찰을 공격하는 광고판을 세워봤자 경찰의 표적이 될 뿐이라 지적하는 전 남편 찰리(존 호크스)의 말에 밀드레드는 “더 많이 관심을 끌수록 사건이 해결될 가능성도 더 높아”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원하는 게 확실하니, 제 병을 고백하며 인정에 호소하려는 윌러비에게도 눈 하나 깜빡 않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죽고 난 다음이면 광고효과도 떨어질 거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걱정하느라 세상이 원하는 피해자상을 연기할 생각 따위, 밀드레드의 심중엔 한 톨도 없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운 태도’를 강요하기 시작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그 지옥을 우리는 이미 <한공주>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전 잘못 한 게 없는데요.” 자신에게 타향으로 떠나 있을 것을 종용하는 어른들 앞에서 공주(천우희)는 묻는다. 왜 잘못 한 사람들을 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추방하는지. 공주를 새 학교로 데려다 준 선생(조대희)은 기묘한 답을 들려준다. “공주야, 너 잘못 안 한 거 다 알아. 그런데 그게 아니야.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세상에 뭐 잘못했다고 죄인이고, 그러지 않았다고 그러지 않은 것도 아니야.” 잘못이 없어도 죄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세상이니, 고개 들지 말고 시키는 대로 살라는 이야기다.
경찰서에서도 그랬다. 형사는 공주의 휴대폰 발신목록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건 전화 내역을 찾아 보여주며 묻는다. “다 네 친구잖니.” 공주를 찾아온 아버지(유승목)는 새 환경에 적응해 잘 지내보려 하는 공주의 말을 욕설로 받는다. “지낼 만 해?” “응, 좋아.” “좋기는, 니미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좋을 수 있냐는 듯. 물론 이 중 누구도 진짜 공주의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욕망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상대가 온순한 피해자이기를, 그래서 제 마음을 크게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공주는, 또 다시 죄없이 근신을 당하게 되는 순간 침묵을 택한다. 항변해 봤자 안 들어 줄 거니까, 소리 내면 또 소리 낸다고 더 싫어할 거니까.
우리가 딕슨(샘 록웰)을, 찰리를, 공주를 괴롭히는 수많은 이들을 비난하는 건 쉽다. 하지만 우리라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답기를 요구하는 폭력을 안 저지르고 살까? 어떤 미투는 진짜 미투가 아닌 것 같다고 미투의 판관이 되고, 내가 나간 시위는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평화 시위지만 저 시위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 억지 시위라며 비난하는 이들이 우리 사이에도 섞여 있지 않던가? 피해자 또한 살아 숨쉬고 일상을 살며 때로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이며,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하는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온순한가가 아니라 상대가 당한 일이 부당한가 아닌가여야 한다. 그 사실을 잊기 시작하면, 세상은 가도 가도 미주리 주 에빙일 것이고 공주는 영원히 정주하지 못할 것이다.
감독 이수진
주연 천우희, 정인선
시놉시스
열 일곱, 누구보다 평범한 소녀 한공주.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 이상 노래할 수 없고, 친구가 있지만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다신 웃을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와 노래는 공주에게 웃음과 희망을 되찾아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 학교의 학부형들이 공주를 찾아 학교로 들이닥치는데… 한공주,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