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명함을 만드는데 ‘기획자’를 영어로는 뭐라고 해야 할까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영한사전에서 ‘기획’을 검색하면 plan과 design이 나온다. 그렇다면 기획자는 planner나 designer라고 표기하면 되는 걸까? 한데 왠지 모르게 이 두 단어는 ‘기획’이라는 뉘앙스를 전부 다 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전자가 치밀하게 계산기를 두들기며 목표 달성을 위한 세부 ‘플랜’을 짜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후자는 말마따나 선과 면을 ‘디자인’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 달까.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말이다.

결국 난 기획자를 영어로 바꾸는 걸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 일은 ‘기획’이 대체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7년째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을 하곤 있지만, 여전히 난 ‘기획’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기획에 대한 무력감과 갈증이 생길 때마다 떠올리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일본 츠타야(TSUTAYA) 서점을 운영하는 CCC의 마스다 무네아키 사장이다. 그가 말하는 기획의 정의는 명쾌하다. 한마디로 그것은 ‘제안 덩어리’다. 그중에서도 츠타야 서점은 ‘라이프 스타일 제안’이다. 그가 생각하는 기획자란 아마도 ‘일상의 디자이너’ 혹은 ‘취향의 제안가’ 정도가 아닐까.

“각각의 고객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상품을 찾아 주고, 선택해 주고, 제안해 주는 사람.”
“디자인이 중요하다. 디자인은 가시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념이나 생각에 형태를 부여하여 고객 앞에 제안하는 작업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결국 ‘제안’과 같은 말이다.” – 『지적자본론』 중에서

처음 다이칸야마에 있는 츠타야 매장에 방문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에게 책이나 음반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그것들을 맘껏 향유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공간이 풍기는 ‘절제된 자유로움’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비치된 거의 모든 음반을 직접 들어보고 고를 수 있게 한단 점이었다. 책이야 보통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으니 살펴보고 살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지만, 음반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츠타야에선 듣고 싶은 음반을 아무거나 꺼내와 듣고, 사지 않아도 아무런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공간이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네 취향을 여기서 한번 천천히 찾아봐. 우리가 그럴 수 있게 이런 공간을 마련했어.’

그가 책에서 써 내려 간 기획에 관한 문장들엔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기획력의 원천은 불가능한 일을 떠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기획을 한다는 것은 위화감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획의 질은 모두에게 받은 정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에 비례한다. 자신의 데이터나 자신의 프로그램 따윈 특별할 게 없다고 겸손함을 가질 것.” –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 중에서

현장에서 기획은 끊임없는 설득의 과정이지만, 그 지난한 과정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을 떠안는 용기’를 가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위안을 받았다. 세상 그 어딘가에서 오늘 하루도 무언가 사람들에게 ‘제안’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실 많은 분들이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위화감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플래너와 디자이너 사이 그 어딘가에 서 있을 수많은 기획자 분들이 세상을 한 뼘 더 재미있게 만드는 멋진 ‘제안가’가 되길 바라며!

『지적자본론』
원제 知的資本論: すべての企業がデザイナ-集團になる未來 (2014년)
지은이 마스다 무네아키
옮긴이 이정환
출판사 민음사
출간일 2015-11-02
츠타야 서점을 기획해 성공시킨 마스다 무네아키의 경영 철학이 담긴 책. 그의 경영 철학을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고객 가치의 창출’과 ‘라이프 스타일 제안’이다. 지적자본의 시대에 ‘제안력’이 지닌 절대적 중요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전한다. 그는 책과 음반, 영상 콘텐츠를 제안 덩어리, 지적자본(기획하고 제안할 수 있는 능력)으로 판단했고, 그 점에 착안해 ‘삶에 필요한 물건’이 아닌 ‘삶 자체’를 팔 수 있었다.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
지은이 마스다 무네아키
옮긴이 장은주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출간일 2017-11-21
마스다 무네아키 사장이 10년간 사내 블로그를 통해 사원들에게만 공유했던 기록을 정리한 책. 『지적자본론』이 츠타야를 만들게 된 과정이나 기획 자체에 대한 마스다 무네아키의 생각의 자취를 더욱 촘촘하게 살펴볼 수 있는 책이라면, 이 책은 그가 실제 조직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 강조했던 조직의 목표나 방향성, 직원을 대하는 태도 등에 관해 진솔하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다. 조직의 리더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