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죽음이라는 개념에 겁에 질렸던 순간을 기억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죽음이 무엇인지 감을 못 잡고 헤매던 나는, 모두가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고 지팡이를 짚으며 서럽게 우는 모습 앞에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이제 감각도 생각도 행동도 없는 완벽한 무의 상태로 간 것이며,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죽음이 오는 걸 피할 수 없다는 압도적인 양의 정보가 어린 내 머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언젠가는 나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겁에 질렸던 나는 그 후로 종종 거실 티테이블 밑에 머리를 넣고 누워서는 아무도 모르게 숨을 참는 연습을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준비된 순간 능동적으로 죽어버리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어린 내가 취한 행동이 그리 별난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건 얼추 서른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에 끝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인간이 취하는 행동이란 게 대동소이하구나 싶었다. 29년이 흐른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아있는 이들이 얼마나 슬퍼할지도 알고, 내 힘으로 부양해야 하는 반려동물들도 생겼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 자체에 무덤덤해졌다. 알게 된 지 너무 오래 되어 그 공포를 잊은 데다가, 너무 먼 이야기라 실감도 잘 안 난다. 북한을 오래 머리맡에 얹어 두고 살아온 남한 사람들이 북핵 문제에 심드렁한 것처럼, 혹은 국민연금을 처음 넣기 시작한 20대들이 수령 가능성에 회의적인 것처럼.

죽음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왕년의 서부극 스타인 <더 히어로>의 리(샘 엘리엇)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랬으니 일흔 한 살이 되도록 딸 루시(크리스틴 리터)에게도 제대로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채 대마초나 태우며 시간을 보냈겠지. 당장 내일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더 일찍 사과하지 않았겠나. 자신이 췌장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리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 무언가 시작해 보려 한다. 리는 루시에게 연락하고 우연히 알게 된 샬롯(로라 프레폰)과 감정을 나누며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간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리도 단순하고 어리석은지. 살 날이 창창하게 남은 어린 날에는 먼 미래의 죽음을 겁내 생 전체를 죽음의 너머로 떠밀고, 충만하게 살아야 할 세월에는 공포를 잊은 채 삶을 지루해 하다가, 정작 죽음이 코 앞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지나온 생을 돌아보고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허겁지겁 해치운다.

“죽는다는 건 인생을 배우는 정말 어려운 방법이야. 그게 나한테 생긴 일이란다.” 요람에서 자고 있는 아들 브라이언을 보며 중얼거리던 밥(마이클 키튼)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마이 라이프> 속 밥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아내 게일(니콜 키드먼)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죽을 확률이 높다는 의사의 말에 밥은 밀린 숙제처럼 제 삶을 복기한다. 복기해 본 삶은 불만족스러운 것 투성이다. 이 악물고 노력해 광고계의 큰 손이 됐지만, 일에 바빠 주변에 진심을 토로할 친구 하나 남겨두지 못했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줄 가족들과는 오래 전에 의절하다시피 했다.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다 싶었는데, 가만히 따져보니 어린 시절의 상처도 공포도 극복하지 못한 채 방어적인 자세로 웅크리고 살아 온 것이다. 밥은 뒤늦게 홈비디오로 아이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기록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주고, 세상과 화해한다. 정말 어려운 방법으로, 밥은 다 늦게 인생을 배운다.

두 영화 모두 죽음이 목전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야 비로소 삶의 찬란함을 깨닫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전까지 지리하고 단조롭던 인생이 꼭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찬란해질 리가 없다. 그저, 우리가 잊고 살 뿐이다. 생은 언제나 제 나름대로 지리하고 제 나름대로 찬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지루함과 싸우고 찬란함에 감탄할 수 있는 시간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마이 라이프>(1994)
My Life
감독 브루스 조엘 러빈
주연 마이클 키튼, 니콜 키드먼
시놉시스
밥 존즈는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항상 아버지와 식구들을 챙피하게 생각하며 성공하기 위해 집을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LA로 진출, 그곳에서 광고업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아름답고 세련된 도시의 여성 게일과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아내가 임신한 후 신장암이 이미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밥은 태어날 아기에게 자신의 모습과 또 아기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디오에 담아놓는다. 마지막 희망으로 호선생이라는 중국의 명의를 찾아간 밥은 마음의 분노를 없애라는 말을 듣고는 고향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족들과 또 논쟁을 벌이게 된다.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아기에게 벌써부터 한없는 사랑을 갖고 있던 밥은 하나님에게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