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시선을 따라, 일획이 만획인 세상 속으로
세상엔 하고 픈 이야기가 있어 만든 영화가 있고,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 있어 만든 영화가 있다. <러빙 빈센트>(2017)는 단연 후자다. 서사만 놓고 본다면 <러빙 빈센트>는 평평한 영화다. 미처 부치지 못한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를 그의 동생 테오에게 전해주라는 아버지의 채근을 받고 파리로 길을 떠난 청년 아르망은, 테오 또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길을 돌려 빈센트가 숨을 거둔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아가 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쫓는다. 그러나 아르망을 탐정 삼아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서스펜스 구조는 좀처럼 뜨겁거나 긴박해지지 않고, 영화는 예상 가능한 안전한 결말로 흘러간다. 그럼에도 이 평평한 영화를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린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영화가 6만 5천여 프레임이 한 장 한 장 유화로 그려진 세계 최초의 유화 장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의 작풍을 학습하고 훈련한 120여명의 화가가 그려낸 프레임들 속에서, 우리는 반 고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느꼈던 고독과, 그 고독을 뚫고 제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던 열정,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입히는 걸 두려워했던 섬세한 영혼의 시야가 온전히 관객의 것이 된다. 이쯤 되면 서사의 평평함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도로타 코비엘라 감독은 반 고흐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유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서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반 고흐를 향한 찬연한 헌사가 됐다. 자신이 그려낸 아를의 풍경,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황금빛 밀밭, 밤하늘을 채우는 타오르는 별빛들이 붓질 그대로 화면 위에서 물결치듯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반 고흐 또한 기뻐했으리라.
코비엘라 감독이 유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반 고흐의 삶을 택했다가 그를 향한 헌사를 완성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처럼, 임권택 감독 또한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오원 장승업의 삶을 택했다가 그를 향한 헌사를 완성하는 데 이르렀다. <취화선>(2000)은 세로로 길게 뻗은 족자 형태가 주를 이루는 한국화가 지닌 아름다움을 1.85:1화면비의 비스타비전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를 놓고 임권택 감독이 서구의 영화문법 전체와 씨름을 한 작품이다. 해서 <취화선>은 영화 전체를 열두폭 병풍처럼 감상해야 하는 영화다. 어느 폭에서는 그림을 그릴 만한 풍경을 찾아 팔도를 유람하며 가도 가도 끝없는 갈대밭을 걸어가는 장승업을 원경으로 잡다가, 어느 대목에선 매에게 쫓기는 되새떼를 처연하게 바라보는 <취화선>의 화면은 한국화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 아예 그 자체로 한국화가 되고자 하는 감독의 야심이 담겨있다.
그렇게 해서 <취화선>이 도달한 자리는, <러빙 빈센트>가 그러했듯 장승업의 삶에 대한 치열한 헌사다. 임권택 감독은 관리 자리를 누렸던 김홍도나 당대 문인화가들의 삶을 담아내는 대신, 한국화의 전통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치열하게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았던 프로 화가였던 장승업의 삶을 택했다. 장승업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지기를 갈망했고, 새로움에 대한 제 갈망을 채 따라오지 못하는 세상의 평가 앞에서 고독했다. 갯벌 한 가운데에서 옛 스승을 발견하고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서로를 얼싸안은 장면은 장대한 수묵처럼 아름답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 이미 자신이 떠나온 옛 그림을 붙잡고는 “한 획의 낭비가 없는 기운생동의 걸작” 운운하는 스승을 바라보는 장승업의 눈빛은 더 없이 쓸쓸하다. 그는 이제 제 스승에게조차 온전히 이해 받지 못한다. 세상은 겨울이고, 화가는 늙은 몸뚱이를 이끌고 세한도 같은 눈밭 속을 또 홀로 걷는다.
글쟁이는 글로 말하고 가수는 노래로 말하며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들이 만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주는 이 없이 오로지 화폭과 나 둘 만의 세계 속에서 고독하게 살다 간 화가들의 세계는, 그 필법 한 획 한 획을 고스란히 화면으로 옮겨내고자 했던 이들의 노고 속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고 이해의 대상이 됐다.
감독 임권택
주연최민식, 안성기, 유호정, 김여진, 손예진
시놉시스
조선시대 말기의 한양 땅. 어린 장승업(최민식)은 거리의 부랑자로 떠돌다 개화파 선비 김병문(안성기)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그림의 소질을 계발한다. 천재를 타고난 덕에 곧 걸출한 화원이 되고 궁중에까지 진출하지만,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방랑벽이 심한 탓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소운(손예진)에게 첫 연정을 느끼고, 매향(유호정)을 평생 사랑하지만, 그가 짧게나마 동거하는 여인은 억척스런 기생 진홍(김여진)이다. 시대적 격랑과 예술적 갈증 사이에서 방황하던 장승업은 결국 모두의 곁을 영원히 떠나는 길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