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는 순간 비리가 자라난다. 로메오(안드리안 티티에니)도 그렇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젊은 날을 희생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바꾼 것 같지 않은데 자신만 늙어버렸다. 세상이 다 시큰둥해진 로메오는 적당히 미지근해진 채 산다. 딸 엘리자(마리아 드라구스)를 학교 앞에 바래다주고는 출근하기 전 숨겨둔 정부의 집을 들러 몸을 섞는 나른한 삶. 그래도 아버지라고 딸만큼은 그런 세상에서 자라지 않기를 바랐다. 공교육만 믿을 수 없어 어려서부터 영어 과외 선생을 붙여준 엘리자는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영국의 명문대들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하필 졸업 시험을 하루 남겨 놓고 딸은 학교 코 앞에서 강간미수 및 폭행치상을 당한다. 졸업시험을 망치면 영국 명문대도, 서유럽에서 엘리트가 되는 삶도 물 건너간다. 엘리자가 사건의 여파로 시험을 망칠 것을 염려한 로메오는, 보다 본격적으로 특권과 인맥을 이용한 비리에 가담한다.

<엘리자의 내일> 속 로메오가 제 특권을 이용해 딸의 앞길을 열어주려 한다면, 로메오와 같은 사회적 지위도 돈도 특권도 없는 가난한 여인 혜자(김혜자)는 직접 발로 뛰어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려 한다. 봉준호의 작품 중 가장 어둡고 메마른 작품인 <마더>의 주인공 혜자는 남들에게 큰 소리로 대거리 한번 못 하는 사람이다. 약재상 사장(박명신)의 말에 굽실거리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 형사 제문(윤제문)에게 따지러 갈 때조차 상대가 제 말을 안 들을까 봐 보약을 지어 가져가는 만년 약자. 그랬으니 변호사(여무영)라고 불러 온 인간이 형편 없이 태업을 해도 혜자는 제대로 화 한번 내지 못한다. 하지만 아들 도준(원빈)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혜자는 초인이 된다. “엄마는 아무 것도 믿지 마. 다 필요 없고, 나도 믿지 마. 엄마가 직접 찾아, 진짜 범인을.” 아들 친구 진태(진구)의 말을 들은 혜자는 일평생 자신을 무시해왔던 시스템에 기대는 대신 직접 자력구제에 나선다.

한 쪽은 시스템의 허점을 너무 잘 알고, 다른 한 쪽은 시스템에 제대로 편입되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둘 다 시스템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안다. 자식을 향한 지극한 마음을 핑계로, 로메오는 권력형 특혜 비리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혜자는 마을의 음습한 비밀 속으로 돌진한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간 곳에 구원 같은 건 없었다. 엘리자는 로메오에게 불륜과 부정에 대해 따져 물으며 영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싸늘하게 외치고, 도준은 떠올리라던 사건 당일날의 알리바이는 못 떠올리면서 어릴 적 같이 죽자고 음료수에 농약을 타서 주던 혜자의 과거를 떠올려 내고 화를 낸다. 자식을 생각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온갖 야단법석을 합리화해 왔던 로메오와 혜자이지만, 정작 그 자식인 엘리자와 도준이 제 죄를 따져 묻는 상황 앞에선 더 이상 도망갈 곳도 남지 않았다. 로메오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고, 혜자는 허벅지 안쪽 자신만 아는 침 자리를 찾아 가슴 갑갑하게 하는 기억을 지우기를 소망한다.

상처투성이가 된 그들에게 무언가 위안이 된다면, 그래도 자식세대만큼은 자신이 겪은 부정하거나 불행한 삶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크리스티앙 문주와 봉준호는 그런 쉬운 희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해가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달려온 로메오와 혜자는, 제 자식인 엘리자와 도준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티 없이 정직하지도 선량하지도 않다는 사실 앞에서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제가 잘못한 건가요?” “엄마는 왜 이런 걸 놓고 다녀?” 자식들의 질문에 로메오와 혜자는 답하지 못한다. 아이에게 엘리트가 되는 미래를 가르치고, 누구라도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에겐 힘으로 본때를 보여주라고 가르친 건 자신들이었다. 시스템 안에서 정직하기만 해서는 행복해지거나 존중 받지 못 하리란 걸 아이들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이 폐허 앞에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가 남긴 질문이 꼭 로메오와 혜자만을 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더(2009)>
감독 봉준호
주연 김혜자, 원빈
시놉시스
읍내 약재상에서 일하며 아들과 단 둘이 사는 엄마. 그녀에게 아들, 도준은 온 세상과 마찬가지다. 스물 여덟, 도준은 나이답지 않게 제 앞가림을 못 하고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 엄마의 애간장을 태운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살해 당하고 어처구니없이 도준이 범인으로 몰린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엄마. 하지만 경찰은 서둘러 사건을 종결 짓고 무능한 변호사는 돈만 밝힌다. 결국 아들을 구하기 위해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범인을 찾아나선 엄마. 도준의 혐의가 굳어져 갈수록 엄마 또한 절박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