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시인의 딸이 학교에서 국어 숙제를 가져왔는데 마침 주제가 자신의 시였고, 시인은 해당 시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아빠가 알려준 대로 썼더니 다 틀렸어!”라고 말했단다. 시인들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문제를 풀면 틀린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문학과 멀어진다. 문학을 자유롭게 읽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부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환경의 영향이 클 것이다. 특히 시집을 내 돈 주고 사서 읽게 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시는 왠지 어렵고, 나와는 먼, 읽는 사람들이나 읽는 전유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시집 서점이 생기고, 초판 5천 부 시인이 늘어나는 등 시가 다시 부흥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시집은 초판 2천 부를 찍고, 중쇄까지 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문학 출판사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독자들에게 그러니 제발 시집 좀 사 읽어달라 읍소하려는 건 아니다(물론 읽어 주시면야 대환영이다). 단지, 때로는 몇 줄의 시에서 얻는 위로가 꽤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 그렇다.

고3 때, 4교시 수업 시간에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처음 접했던 순간이 생각난다. 시가 너무 좋아서, 수업이 끝나고도 읽고 또 읽느라 밥때를 놓칠 뻔했다(고3 수험생에게 급식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렇게 그 시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후 지방에서 서울로 진학해 혼자 살면서 엄마가 그리울 때, 취업 후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삶이 고단할 때 문득 그 시가 떠올랐고, 가만히 시 구절을 되새기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덜 쓸쓸했다.

싱고 작가의 웹툰 에세이 『詩누이』를 읽고 「가난한 사랑 노래」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시를 읽고 그림을 곁들인 에세이로 표현한 이 책은 총 서른네 편의 시 웹툰이 수록되어 있다. 각 에피소드는 사랑스러운 그림과 따뜻한 글, 그리고 시 한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때로는 시보다 에세이가 더 와닿기도 했다. 일상에 치이고 사람에 상처받을 때,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 2014년 봄 이후로 이유 모를 슬픔과 무기력함에 빠져있을 때 이 책에 실린 에세이와 시를 읽으면서 격하게 공감하기도 하고, 울고 웃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많이 하고
집에 도착한 날은
심장에 불이 꺼진 기분
타인의 기분을 억지로 맞추다보면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고르게 되고
팽팽하게 다잡았던 마음에
올이 풀려버려서
가장 중요한 게 빠져나가는 느낌(…)
이제 괜찮다고
한결 가벼워졌다고 설탕을 입에 털어 넣지만
입속에 남은 단맛을
혀로 느끼면서
가만, 물어보게 됩니다
나는 나와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정말 괜찮은 건지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중에서

저자명인 ‘싱고’는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를 펴낸 신미나 시인이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필명이다. 시인은 “다른 방식으로 시를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고민에서 시 웹툰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글과 그림들은 따스한 위로로, 작은 기쁨으로, 선물처럼 다가온다. 굳이 시에 대한 큰 관심이나 애정이 없어도 괜찮다. 지금 어떤 이유로 잠시 지쳐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 어깨를 ‘토닥토닥’해주었으면 싶다면, 이 책을 한번 펼쳐보는 건 어떨까.

“시와 친해지고 싶은데, 어떤 시부터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주세요. 되도록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한편씩 읽어주세요. 잊은 듯이 지내다가 이 책에서 봤던 시와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것대로 보람이겠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詩누이>
지은이 싱고
출판사 창비
출간일 2017-06-12
『詩누이』에는 시인 자신의 캐릭터인 ‘싱고’, 그리고 그녀와 십년 넘게 함께 살고 있는 인간 나이 69세의 고양이 ‘이응옹’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좋은 시를 읽으면 눈을 반짝”(7면)이는 싱고는 일곱 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취업대란과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었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30대 여성으로, “핀란드의 할머니처럼 우아하게 늙고 싶고 환갑이 넘어서도 스웩을 잃지 않는 힙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8면)는 꿈을 가지고 있다. “좌로 봐도 둥글, 우로 봐도 둥글어서”(11면) ‘이응’이라 불리며 싱고와 함께 사는 거묘(巨猫) 이응이는 종종 싱고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싱고에게는 더없이 각별한 친구이다. 이들은 서로 툭탁거리면서도 일상의 고락을 함께하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삶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싱고는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한편의 시가 말을 걸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가 물꼬를 트고 흘러나오길 기다렸”(296면)다고 말한다. 시와 그림이 잘 어우러지길 바라는 싱고의 마음이 따뜻한 책 한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청춘이 뭐 이렇게 시시한가”(222면) 하는 편벽한 마음이 들 때, “다른 이와 주파수를 맞추며 사는”(120면) 게 힘들게 느껴지거나 야근을 하다 막막해질 때, 혹은 그저 엄마가 그리울 때 ‘詩누이’ 싱고가 건네는 시와 그림을 선물처럼 받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