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90년대에 내가 자라면서 겪은 역사적 사건은 마치 극적인 이야기 같았다. 기억하는 사건만 꼽아도 굵직굵직한 것이 쏟아진다. 87 민주항쟁, 88 서울올림픽, 89 베를린장벽 붕괴, 90 독일 통일, 91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소련 해체, 93 문민정부 출범, 94 김일성 사망 등. 저 이야기의 흐름상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는 당연한 귀결로 인식되어서 내가 살아갈 21세기 미래는 공산주의 국가와 체제 갈등은 해소되고 자유 민주주의는 알아서 잘 돌아가겠구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적어도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공고할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는 10대의 순진한 상상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매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체제의 연약함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게 현실이라는 말처럼, 상상하지 못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 2016년에서, 한숨만 푹 쉬며 외면할 사건은 분명 아니었다. 당선을 예상한 적 없는 대통령의 탄생부터 탄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투표하여 새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숨 가쁘게 벌어진 일련의 일들로 인해 생성된, 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다면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말한 것을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때마침 미국의 역사가 티머시 스나이더가 쓴 <폭정>을 발견했다.

책의 부제는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으로서, 스나이더는 20세기에 민주주의가 파시즘과 나치즘, 공산주의에 굴복했던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유산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당시 유럽인보다 ‘결코 더 현명하지 않지만’ 이점이 있다면 그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결코, 더 현명하지 않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나이더는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 연구자로서, 이 분야는 대개 왜 독일 국민은 히틀러를 용인했는지, 이러한 반인류적 범죄를 국민 차원에서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탐구하기 마련이므로 폭정이라는 제목을 소화해서 전달하는 데 무엇보다 적격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160여 쪽의 짧은 분량이라는 한계상 20세기의 사건을 일일이 설명하는 친절함은 없다. 하지만 히틀러, 스탈린 등 그 시대의 악몽을 만든 이들의 궤적을 거론하며 스무 가지로 정리된 내용은 명확하다. 시민은 통치자에게 알아서 복종하지 말고, 선동하는 언어에 주의하며, 군대 조직을 경계하고, 용기 있게 서로를 지키며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은 이와 밀접한 경험을 지난 겨우내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연약함을 몸으로, 정치적으로 경험했기에 글로 정리한 것이 더더욱 깊이 있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사실 이 책의 집필 의도는 도처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미국 대선 이후 나온 책이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언어에 현혹되지 말고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폭정을 경계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우리나라에도 의미 있는 서술이 많기에 민주주의의 가치와 의의를 찾는 이에게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짧으니 부담도 적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지만 가르침을 준다”라는 첫 문장만 숙지해도 좋을 법하다.

읽으면서 내내 여러 문장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으나 펜을 잡으니 모두 사라지고 겨우 한 줄만 건졌다. 역사를 읽을 줄 알아서 다행이다.

<폭정>
지은이 티머시 스나이더 Timothy Snyder
출판사 열린책들
출간일 2017-04-20
원제 On Tyranny
미국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의 신작 <폭정>은 누구라도 한두 시간이면 다 읽어 낼 만한 분량이지만 파시즘과 홀로코스트 같은 20세기의 비극을 통해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은 ‘폭정’을 막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알아야 할 역사의 교훈 20가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트럼프 당선 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설명한 가장 신속한 대응에 속했다. 지식인의 대응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미국의 지식인 사회는 결코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나이더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반응했다. 즉 ‘트럼프가 왜 당선되었는가?’라고 묻지 않고, 곧장 이제 ‘시민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는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현실화되자마자 준비했던 행동에 나섰다. 트럼프의 집권은 민주주의가 굳건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에 균열을 내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스나이더는 다시 역사를 강조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시민’이 되기를 촉구한다. ‘개돼지’로서 ‘폭정’의 희생자가 되는 대신, 사회와 제도의 건설자이자 수호자, 역사의 개척자로서 거듭나기를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