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기에 좋았다
살구, 문제는 살구였다. 45킬로그램에 달하는 살구 더미가 눈앞에 떨어졌다. 이날이 오기 두 해 전 여름, 그녀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세 상자에 가득 담겨 도착한 녀석들은 텅 빈 집, 더 이상 돌봐줄 사람이 사라져버린 나무에서 거두어온 것이었다. 어느 것은 덜 익었고 어느 것은 썩어가고 바닥에 한껏 벌여놓은 살구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때때로 뭉개진 것을 솎아내며 솔닛은 직감한다. 여기,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고. 어머니와 나 그리고 우리 사이의 이야기가.
그녀의 어머니는 “뜯어지는 책” 같았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하나씩 지워지는, 책의 뒷장부터 투두투둑 떨어져 나가는 그런 책. 그제야 비로소 작가는 ‘다시’ 동화를 읽기 시작한다. 아름답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꼭 자기에게 들이닥친 “동화 속 저주” 같아서. 어린 시절, 변덕스러운 감정과 불안정한 마음 상태의 어머니가 만들어낸 출구 없는 이야기의 파도에 솔닛은 휩쓸려 다녔다. 종종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던 쌍둥이 여동생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며, 타고난 금발마저 시기할 때 솔닛은 ‘백설공주’를 떠올리고, 기억을 상실해가는 어머니는 스스로를 ‘신데렐라’로 여겼을지 모른다고 짐작한다. 그러고는 다짐한다. “어머니가 내게 극지방으로 가는 여정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끝까지 한번 가볼 생각이었다”라고.
<멀고도 가까운>은 정말로 ‘작정한 듯’ 온갖 이야기로 넘실댄다. 어머니와의 기나긴 불화, 친절하지 않은 세상을 견디기 위해 오직 책 속으로 파고든 과거, 자신의 몸에서 발견된 종양과 수술과 견딤, 글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고찰, 신체적·정신적 고통 앞에 곁을 지켜준 이들과의 우정, 아이슬란드로의 떠남, 그동안 만나고 듣고 읽어온 얽히고설킨 모든 생명들의 삶…….
솔닛은 무수한 이야기 사이를 미끈하게 유영하지만 독자로서는 그다음을 예측할 수 없다. A를 말하다가 B를 꺼내 들고 A′를 보여주었다가 C로 이었다가 돌연 A″로 향해간다. 친구와 대화하다 ‘아, 그런데 말이야 그 말뜻이 뭔지 알아?’ 하며 다른 웅덩이로 빠졌다가 ‘근데 우리 이 얘기를 하고 있었나’로 돌아오듯이. 그렇게 빙빙 원을 그리며 정확한 방향은 알 수 없으나 책은 조금씩 나아간다. 어쩌면 우리의 일생도 그런 것 아닐까.
조곤조곤 그녀가 꺼내놓은 이야기들은 몇 단락씩 잘라 어디에 이어 붙여도 상관없을 만큼 별개의 장면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그게 싫지가 않아서 책장이 줄어들수록 ‘오, 부디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하며 바라게 될 정도다. 수백 개의 반짝이는 이야기조각으로 이루어진 모음집이라고 해야 할까.
아리아드네는 미궁으로 들어갈 테세우스를 위해 붉은 실을 건넸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하여 풀면서 들어갔다 올 때는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그러나 솔닛이 우리에게 건넨 것은 흡사 마음껏 길을 잃어보라고 내민 실 같다. 그런 의미에서 『멀고도 가까운』은 삶이 버거워 다른 곳으로 숨고 싶을 때 아무 데나 펼치기에 좋은 책이다. 내가 지금 뭘 읽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깊숙이 끌려들었다가 허청허청 헤매도 좋을 책. 무엇보다 언젠가, 생에 한 번쯤 혹은 여러 번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도래했을 때 이 책은 하나의 영감이 되어줄 것이다.
지은이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
출판사 반비
출간일 2011-12-20
원제 The Faraway Nearby
<멀고도 가까운>은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로 21세기에도 만연한 젠더 불평등의 핵심을 명쾌하게 요약하며 명성을 얻은 바 있는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다. 이 책의 주요한 주제는 읽기와 쓰기, 고독과 연대, 병과 돌봄, 삶과 죽음, 어머니와 딸, 아이슬란드와 극지방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프로이켄의 <북극 모험>,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리고 <백조 왕자>, <눈의 여왕> 같은 구전 동화들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활용해 솔닛은 주변의 여러 삶들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마침내 이해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변명하거나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 혹은 작가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해이다. 작가는 이를 용서이자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밀한 회고록이지만 읽기와 쓰기가 지닌 공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유려하게 웅변하는, 솔닛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에세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