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bookshelf_201702

기분 나쁜 하루를 상상해보자면, 이렇다.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장마철, 후텁지근한 공기가 팔다리에 쩍 들러붙어 떨쳐낼 수 없다. 이웃이 아무렇게나 내놓은 쓰레기 냄새가 뻔뻔하게 창문을 넘어 방을 차지하고 무슨 짓을 해도 나가질 않는다. 썩은 내를 내뿜는 싱크대 뒤로 다리 많은 벌레가 슬몃슬몃 보이는 듯하지만 잡을 수 없다. 파리와 모기는 방심할 때마다 무방비 상태였던 음식과 피부를 물어뜯고는 도망친다.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으로 식히는 열보다 냉장고가 뿜어내는 열이 더 많은 걸 알면서도 차마 끌 수 없다. 누울 자리도 없는 방이 더위에 점령당해 카페로 쫓겨난다. 겨우 자리 잡고 앉아 책을 펼치는데 맞은편에서 아이가 울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옆자리에서는 두 사람이 끔찍하리만치 듣기 싫은 연애사를 큰 소리로 늘어놓는다. 전에 앉은 사람이 흘린 음료가 테이블에 묻어 있어서 닦고 싶은데 마침 휴지가 없다. 한 번 보인 얼룩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제는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까지 거슬리기 시작한다. 음료를 반도 마시지 않았는데 카페를 나갈 수도 없고(게다가 다른 카페까지 걸어갈 동안 땀 흘릴 생각을 하면 그냥 주저앉고 싶다), 이어폰을 두고 와서 음악으로 소음을 막을 수도 없다. 자리라도 옮길까 싶은 그때, 누군가 테이블을 툭 치고 간다. 잔이 쓰러지고, 바지가 젖는다. “미안해요.” 최소한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하는 사과에 진심이 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괜찮아요.”뿐이다.

<제비뽑기>를 읽는다면 이런 불쾌한 기분 속에 빠져 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주변을 감싸는 요소 하나하나가 아주 무신경하게 일상을 침범하고 위협하는데, 거기에 저항할 힘도 없고 예의를 차려 대응할 수도 없으며, 그러지 말라고 쏘아붙일 수도 없고 피해 주지 말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이 여성의 일상이자 일생일 수 있다. 오래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여전히.

드라마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방영된 미드 ‘에이전트 카터’와 ‘슈퍼걸’이 좋은 사례가 될 것 같다. ‘에이전트 카터’는 1946년 뉴욕이 배경인데, <제비뽑기>와 시대 배경도 비슷하고 주로 도시 여성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도 비슷하다. 1945년 이전에는 이차대전 동안 군에 차출된 남성의 빈자리를 여성 인력이 메웠는데,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돌아오자 상당수는 (그나마 남자들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던) 직업을 잃고 가정과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드라마에서 그런 압력과 성차별을 묘사할 때마다 <제비뽑기>가 떠오르곤 했다. 참전용사는 웨이트리스에게 음식 투정을 하고, 직장에서 남자들은 여성을 동등한 직원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은 여자 몫으로 떠넘겨진다. 현대가 배경인 ‘슈퍼걸’에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성 슈퍼히어로는 커피 심부름을 하고, 미디어는 끊임없이 남성 슈퍼히어로와 비교한다. 70년이 지났는데 그때와 별반 달라진 점이 없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얼마나 나아질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책에 실린 첫 단편부터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턱턱 걸렸다. “아저씨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두려워했다면 현재가 이렇게 형편없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당신이 길에서 마주친 그녀가 10년, 20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면,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모두가 영원히 불쾌한 사회적 치통을 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철에 좁은 방에서 쫓겨나듯, 자기 고향과 집을 떠나서 독립해야 비로소 숨통을 돌릴 수 있는 여성들, 카페뿐 아니라 도시 어디에서도 안락한 자리를 얻을 수 없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여성들이 있다면.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치통은 진통제로 없앨 수 없다.

<제비뽑기 >
지은이 셜리 잭슨
옮긴이 김시현
출간 정보 엘릭시르 / 2014-12-29
원제 The Lottery And Other Stories(1949)
셜리 잭슨은 20세기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고립되고 오래된 저택에 사는 수상한 거주자들을 다루는 고딕 미스터리에 혁신적인 작품들을 남겨 고딕 호러의 선구자로 불리는 잭슨은 특유의 기괴한 필치로 호러와 서스펜스를 포함한 문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미국 문학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리는 표제작 <제비뽑기>를 비롯해 일상의 광기와 공포를 다룬 25개 작품들이 실린 셜리 잭슨의 명단편집이다.
단편 <제비뽑기>는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그리다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잔인한 결말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은 문명사회의 이름 아래 숨겨져 있던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잔혹한 행위와 행위가 벌어지는 날의 따사롭고 맑은 날씨를 대비시켜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주제의식과 이야기의 재미, 충격적인 반전까지 대단하다는 점에서, <제비뽑기>는 “미국 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단편”이라는 칭호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가 꼽은 “최고의 공포 소설 중 하나”라는 칭호를 동시에 얻는 등, 인간 사회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했다는 평을 받으며 현대에는 영문학 교과서에 빼놓지 않고 포함되고 있다.
특히 2008년 출간된 뒤 영화화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 시리즈 또한 ‘뉴요커’와 ‘옵저버’, ‘내셔널 포스트’ 등에서 셜리 잭슨의 단편 <제비뽑기>에서 기본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라고 추정하는 등, 신진 작가들에게도 변함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