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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같던 병폐가 눈앞에 들이닥쳤다. 올해 우리는 이 나라의 최고 권위자가 웃기지도 않은 막장극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삶과 헌정을 진창으로 이끄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또 권력에 저항하던 예술가들이 하찮은 권위를 앞세워 저보다 약한 이들을 유린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행히 촛불이 광장을 채웠고 낱낱의 목소리들이 힘을 얻기도 했으나, 이제는 안다. 모두가 공유하는 상식이란 없으며 인간의 밑바닥은 예상보다 훨씬 아래 있다는 것을.
황폐화된 지구, 낙진이 하늘을 뒤덮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화성으로 이주했다. 지구에 남아 있는 것은 때를 놓친 몇 안 되는 이들뿐이다. 사람들은 인간형 로봇인 안드로이드를 노예처럼 부린다. 안드로이드는 마치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으며 중추신경과 감정이입 능력 정도만이 인간과 다르다. 주인공 릭 데카드는 지구로 도망쳐 인간 행세를 하며 사는 안드로이드를 잡아 은퇴(파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인간조차 복제가 가능해 가짜 동물이 흔하고 진짜 동물은 낙진 탓에 거의 멸종되어 고가에 거래되는 소설 속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통한다. 겉으로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으니 자신이 감정이입과 공감이 가능한 인간임을 애완동물로 넌지시 내비치는 것이다. 릭 역시 이웃의 진짜 당나귀를 몹시 부러워하며 언젠가 전기양이 아닌 고가의 진짜 동물을 기를 날을 꿈꾼다. 현상금 사냥꾼은 안드로이드를 하나씩 파괴시킬 때마다 천 달러를 받는다. 안드로이드 여섯을 해체시키면 살아 있는 동물을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서 릭은 부상당한 동료의 일을 넘겨받아 최신 기종의 안드로이드를 사냥하려 한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는 동안 릭의 의문은 늘어간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의 삶의 의지를 맞닥뜨리면서 그 전까지 물건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들에게 이입하게 된 것이다. 릭은 자신에게 할당된 안드로이드 여섯을 하루 만에 모조리 사냥했지만,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고백하자면, 시시때때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진짜인지 쉼 없이 의심하지만, 나는 차라리 여기가 가짜이길 바라곤 했다. 다른 우주의 진짜 나는 뭐 그럭저럭 평온하겠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하기 위해 감정이입 테스트를 활용한다. 과연 우리 중 감정이입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세상은 피로하고 모질어서 감정이입을 훌륭히 해내는 사람은 맨정신에 살아내기 힘든 곳이다. 자신이 다치지 않으려거든 눈은 반쯤 감고 귀는 한 짝 막아야 한다. 불통은 낙진처럼 소리 없이 쌓여서 방진복 없이 소통을 꾀하는 사람은 제 몸만 축낼 뿐이다. 꼬집으면 아프고 베이면 피도 나는데, 적절한 것에만 반응하도록 길들여진 선택적 감정이입이 징그러워 나는 가끔 우리가 사람일까 싶다. 남성지 에서는 ‘#살아남았다’를 올해의 해시태그로 꼽았다. 살아남았으며 살아갈 것이지만, 이게 정말 사는 건가 싶은 때,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는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지은이 필립 K. 딕 Philip K. Dick
옮긴이 박중서
출간 정보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09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 “현실성과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는 미국문학의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성과 초현실성을 겸비하고 있으며, 보르헤스, 카프카, 칼비노에 곧잘 비견되곤 하는”(『뉴욕타임스』) 작가 필립 K. 딕의 소설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인간형 로봇인 안드로이드가 험한 일을 대신할 만큼 문명이 발달한 세상, 사람들은 세계대전 이후 방사능 낙진으로 뒤덮인 지구를 떠나 대부분 화성으로 이주한다. 일종의 낙오자 취급을 받는 지구에 남은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동물을 키우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가치를 입증하는 일이다. 안드로이드 현상금 사냥꾼 릭 데카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구로 도주한 안드로이드 여섯을 잡으려 한다. 그러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데다 오히려 생의 의지가 더 강한 신형 안드로이드들을 만나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주인공의 혼란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지금 내가 느끼는 현실을 과연 진짜라고 믿을 수 있는지 등 필립 K. 딕이 생애 내내 고민했던 질문과 주제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