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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자리에서 문득 첩보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기를 굽고 앞 사람의(->앞사람의) 술잔을 채워주면서 조지 스마일리를 생각했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생각했다. 그런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나이 든 스파이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 사실 여기서 ‘첩보 소설’이란 오로지 존 르카레의 소설이다. 나는 다른 첩보 소설의 세계는 잘 모른다.

그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2012년 초의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 시내의 몇 안 남은 상영관을 모조리 찾아다니면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일곱 번쯤 보러 다녔다. 영화를 두 번인가 세 번인가를 보았을 때에 르카레의 원작 소설을 다 읽었다. 그런 뒤에는 킨들판 원서를 샀고 좋아하는 장면들(이를테면 빌 헤이든이 짐 프리도를 정보부 리크루트 담당자에게 추천하던 때의 서류를 스마일리가 읽게 되는 장면이나 짐이 소년 점보와 가까워지는 학교 배경의 장면들)만을 골라서 읽었다.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의 ‘전 세계에서 둘째가는 비밀요원’이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바다’를 끝도 없이 돌려 들으면서였다. 일 년 뒤 여름에는 런던의 한 서점에서 종이책을 샀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의식 같은 것이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실제 1960년대 영국 정보부 안에서 KGB를 위해 일했던 이중스파이의 유명한 스캔들에 바탕을 둔 이야기다. 정보부에서 잔뼈가 굵은 퇴직 스파이인 조지 스마일리가 MI6(소설에서는 ‘서커스’)의 핵심에 자리한 이중간첩을 밝혀낸다는 뼈대를 취하고 있지만 그다지 박진감 넘치는 소설은 아니다. 인물들은 엄청나게 많이 생각하고, 계속해서 타인의 긴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며, 서로가 기억하는 과거가 몇 겹으로 겹쳐지고, 그들 각자의 사정으로 마음 복잡해한다(->복잡해 한다). 내가 2012년에야 만난 이 소설은 그렇게 1974년에 이미 스파이물의 전범이 되었다. 흐릿하고 임의적인 세계,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계에서 묵묵히 안개 속을(->안갯속을) 더듬어 걸어가는 우울한 프로들의 이야기.

어째서 이 이야기에 그렇게 매혹되었을까. 냉전 시대 영국 정보부의 이중간첩이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거듭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볼 때마다 내 마음에 남는 장면은 조금씩 변했다. 연인이 떠난 방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피터 길럼(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다), 임박한 안티클라이막스를 기다리거나 또는 영원히 유예하고 싶어 하며 어둠 속에서 ‘두더지’(이중간첩)를 마주할 준비를 하는 조지 스마일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건 도덕적 판단이었을 뿐 아니라 다분히 “미학적 판단”이기도 했다고 내뱉는 빌 헤이든, ‘진짜 전쟁’을 치르던 자랑스러운 시대를 먼 눈길로 되새기며 애정 섞인 말투로 “나의 남자들”을 회상하는 코니 삭스.

애국이나 신념 같은 분명한 행위의 동기는 여기에 없다.(심지어 그들이 신념, 애국심, 충성심에 근거해 움직일 때조차 그런 것들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진실이 아닌 듯 보인다.) 조직도 국가도 시대도 더 이상 그런 것을 제공해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를 위해 일하든 소련을 선택하여 반역자가 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대단히 자조적인 태도로 배신을 택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누군가는 아주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나의 스파이들이 내 마음에 그토록 깊이 남아서 내게 강박적으로 몇 번이나 냉전 시대의 런던을 찾게끔 했던 까닭은 아마도 그 점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의 절망과 무기력이 40년 전 스파이들의 것만은 아니기에. 우리는 책을 덮으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지속되는 것은 위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사소하고 야비한” 일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련하고 지친 전문가들은 ‘자신의 일을 한다.’ 절망과 지리멸렬과 무력함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지은이 존 르카레
옮긴이 이종인
출간 정보 열린책들 / 2005-07
스파이 스릴러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소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함께 르카레의 양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1960년대 미소 간 냉전 상황으로 스파이전이 심화되던 당시, 영국을 충격에 빠트린 케임브리지 출신 엘리트의 소련 이중간첩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
수십 년 전 모스크바는 영국 정보부 내에 자신들의 스파이를 심어 놓는다. 그리고 지금 그 스파이는 정보부 최고위직에 올라 있다. 모든 작전이 그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중요한 정보망은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다. 혐의자는 정보부장을 포함한 최고위 간부 네 명. 과연 그중 스파이는 누구인가? 은퇴한 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는 어떤 동료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오너러블 스쿨 보이>, <스마일리의 사람들>로 이어지는 ‘카를라를 찾아서’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다. 스마일리와 소련 정보부 우두머리 카를라의 대결을 다루는 이 시리즈는 행동보다는 두뇌와 기지로 상대를 제압하는, 스파이 같지 않은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의 개성과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1979년에는 알렉 기네스 주연의 BBC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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