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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아가씨>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 ‘웃자라다’의 의미를 찾아봤다. “(식물의 줄기나 잎 따위가) 지나치게 많이 자라서 연약하게 되다.”는 뜻이란다. 일조량이 부족한 식물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제 몸을 한껏 뻗는다. 그 탓에 남들보다 한 뼘은 더 큰 대신 곱절로 연약해서, 웃자란 식물은 변변한 꽃도 피워 올리지 못한다. 어쩐지,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를 보는 내내 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더라니. 이모부(조진웅) 탓에 철저히 혼자 고립된 채 탑해트를 쓰고 이모부의 저택을 찾아온 귀족들이 붉은 눈으로 뿜어내는 온갖 습한 욕망을 대신 읽어줘야 했던 히데코를 보며 나는 그 의미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흐릿한 ‘웃자라다’는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해를 못 봐 웃자란 식물을 양지에 옮겨 심으면 금세 꽃을 피워 올리듯, 히데코는 사랑을 만나 마침내 냉소와 고립을 깨고 얼굴 위로 웃음을 피워 올린다. 의도하지도 않았고 제 감정이 그렇게 흘러갈 줄도 몰랐으나 결국 웃자란 히데코에게 햇볕이 되어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숙희(김태리)를 만나서.

저렇게 웃자라 낭창거리던 사람을 어디서 또 본 기억이 있다 싶었다. 나는 기억의 저편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효신(박예진)을 끄집어 올렸다. 또래보다 먼저 세상의 어둠을 봤고 그 탓에 웃자라 늘 또래들과 자신을 격리하려 했던 아이, 구어체로 웃고 떠들던 아이들의 말들 틈새로 문어체의 목소리를 들려주던 이상한 아이. 아마 그랬기에 아침 조회를 빠지려고 화장실에 뛰어들어와 엉겁결에 자신을 공범으로 포섭했던 시은(이영진)에게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리라. 좁아터진 화장실 칸 안에 몸을 딱 붙이고 나란히 서서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웃으며 조용히 하라 말한 시은의 행동은, 효신에겐 고립된 제 세계 안으로 멋대로 뛰어들어와 마음 한 켠을 비집고 들어오는 행동이었을 테니까. 숙희가 그랬듯 시은 또한 그 어떤 것도 의도하지도 않았겠으나, 시은은 효신의 유일한 사랑이 된다. 처음 만난 날 함께 벌을 받으며 제 눈 안에서 눈부처를 찾아보라던 효신의 말은 그 어떤 기교도 없는 사랑의 고백이었다. 불행히도 시은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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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코와 숙희에게 허락되었던 고립이 효신과 시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충실하게 탐구하기엔 시은에겐 주변의 시선이 너무 많았고, 늘 뭔가 비대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효신의 감정을 다 받아내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 둘에게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오래된 저택과 매일 둘만 함께 잠들 수 있는 침실과 또래 무리와의 고립을 허락했다면, 그래서 학교 지붕 위에서 노닐었던 한나절과 같은 시간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었다면, 시은은 효신의 햇살이 되어 꽃을 피워 올리게 해줄 수 있었을까. 효신과의 입맞춤은 좋지만 그런 자신들에게 공책을 던지며 더럽다고 외치는 친구들의 멸시는 두렵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지만 점점 시들시들 힘을 잃어가는 효신을 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벚꽃나무에 목을 매달던 히데코를 구해낸 숙희와 달리 시은은 끝내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학교 옥상에 효신을 혼자 두고 내려온다. 꽃을 피워 올리기도 전에, 잠깐 비췄던 해가 다시 구름 뒤로 들어가버렸다.

17년 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가 처음 극장에 걸렸을 때,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애써 이 영화가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걸 부정하려 했다. ‘내가 동성애를 다룬 영화에 감명을 받았을 리 없’다는 게 근거였다. 애써 ‘순수한 사랑’이나 ‘아름다운 우정’ 따위의 수식어로 포장해야 비로소 안심하는 태도는 아마 시은을 움츠러들게 했던 주변의 시선과 본질적으론 같은 것이었겠지. 17년이 흐른 지금은 뭐가 달라졌을까? ‘<아가씨>는 동성애라기보단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영화’, ‘<캐롤>은 동성애가 아니라 인간애를 다룬 영화’라는 평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거리를 맴도는 저녁, 나는 여전히 ‘오늘날이라면 달랐을까’보다 ‘시은과 효신에게 저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먼저 상상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Memento Mori
감독 김태용, 민규동
출연 김민선, 박예진, 이영진
시놉시스
신체검사가 있는 날, 민아(김민선 분)는 늦은 아침 등교길의 수돗가에서 빨간 표지의 노트를 줍는다. 글씨와 그림으로 빽빽이 채워진 노트는 커플로 소문난 효신(박예진 분)과 시은(이영진 분)의 교환일기. 작년에 민아와 같은 반이었던 효신은 조숙한 언행에다 국어 선생과의 수상한 소문으로 따돌림 당하는 아이다. 민아와 몰려다니는 지원과 연안도 효신을 싫어한다.
민아는 양호실 침대에서 일기를 읽다가 옆자리에 누워 있던 효신과 그를 찾아온 시은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만난 지 1년이 되는 ‘공동 생일’을 맞은 두 소녀는 한달 전 다툼 이후 계속된 침묵을 깨고 둘만의 장소였던 학교 옥상에서 재회한다. 일기장을 넘길수록 주술에 걸린 듯 상상을 통해 점점 효신과 시은의 애절하고 비밀스런 관계 안으로 빠져드는 민아. 오후가 되어 신체검사로 어수선하던 학교는 옥상에서 투신한 효신의 죽음으로 발칵 뒤집히고, 효신에게 사로잡힌 민아는 그녀의 그림자를 계속 밟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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