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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몸담았던 동아리엔 매년 축제 때마다 창작 시극(詩劇)을 선보이는 전통이 있었다. 그해 극본은 1학년인 내 몫이었는데, 이례적으로 많은 수의 신입생이 들어왔던 해라 되도록 배역을 많이 나눠줘야 했다. 장고 끝에 이상의 ‘오감도 시제 1호’를 극으로 옮기기로 했다. ‘질주하는 아해만 모아도 열세 명은 되니까’ 내린 선택이었지만, 그게 재앙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어려운 원작은 각색을 거듭하며 더 어려워졌고, 출연하는 이가 워낙 많았기에 전원을 모아 연습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누구는 대사가 길다고, 누구는 짧다고, 누군가는 극이 난해하다고 투덜거렸다. 개막을 코앞에 두고 모두의 불만이 폭발해 대판 싸웠고, 땜질용으로 급하게 고쳐 써서 올린 시극은 시원하게 망했다. 두 번 다시 이딴 놈들이랑 일 하나 봐라. 나는 저주의 말을 퍼부어댔지만, 동아리를 박차고 나오긴커녕 고3이 될 때까지 그 치들과 함께 뒹굴며 놀았다. 그 고생을 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에 10년 넘게 잊고 살던 기억이었는데, <헤일, 시저>(2015)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변덕스러운 배우들과 자존심 센 감독, 어떻게든 가십을 캐서 기사를 쓰려는 타블로이드지 기자들, 그리고 미처 상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뒤얽힌 아수라장을 이 악물고 수습하는 <헤일, 시저>의 에디 매닉스(조쉬 브롤린)의 모습이 퍽 낯익었던 것이다. 은막의 환상을 깰 만한 지저분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이 늘어놓아야 하는 삶, 그에겐 더 존중받는 일자리를 찾을 기회도 있었고 업계를 떠날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수소폭탄의 등장과 매카시즘의 전조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란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면서도, 에디는 오로지 영화를 만드는 일에만 마음을 줬다. 이게 옳은 일 같다는 기분이 든다면서. 축제를 수습해보려 발버둥 치다 실패한 주제에 끝끝내 동아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한 내 모습이 영화 속 에디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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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 원제 ‘라디오의 시간’) 속 라디오 드라마 공모전 당선자 스즈키(스즈키 쿄카)와 연출 PD 쿠도(카라사와 토시아키)
또한 나나 에디와 비슷한 시간을 통과했다. 아타미 시를 배경으로 평범한 가정주부와 어부 간의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는, 콧대 높은 왕년의 스타 성우가 배역 이름이 촌스럽다며 바꿔 달라고 강짜를 부린 것에서 시작해, 애드리브로 없던 설정을 덧붙인 탓에 급기야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변호사와 우주비행사 간의 로맨스를 다룬 범죄-법정-재난-스릴러-로맨스물로 탈바꿈했다. 어찌어찌 스즈키가 의도했던 해피엔딩으로 끝맺음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이미 대본은 누더기가 됐고 업계의 추악한 민낯은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하지만 속편을 써볼 생각이 없느냐는 방송국 관계자의 질문에 스즈키는 해맑게 웃으며 생각해 보겠다 답하며 쿠도에게 속편의 연출을 부탁한다. 아니, 그 난리를 겪고도 그 짓을 또 하고 싶다고? 왜?
생각해보면 그렇다. 사람 사는 건 언제나 뜻처럼 안 풀리고, 일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 치우고 도망가고 싶은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온다. 그러나 이게 사는 건가 싶은 회의가 밀물처럼 차오름에도 우리가 어떻게든 하루를 버텨내는 건 그런 착각 때문 아닐까.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이 무에서 유를, 일상에서 환상을, 공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 나는 그 망할 시극을 보고 “나는 재미있게 잘 봤는데 왜들 그러지?”라고 무심히 말을 건넨 이의 칭찬에 눈이 멀어 2년을 더 동아리에서 굴렀고, 에디는 간신히 찍어낸 당일 촬영분의 필름을 확인하고는 이직의 마음을 접었다. 스즈키와 쿠도 또한 누더기가 된 드라마를 억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는데 성공하곤 그 성취감에 취해 또 한 편을 기약했다.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실패는 빨리 잊고 영광만 오래 기억하는 종자인지 모른다. 그래서 자꾸 이 구질구질한 하루를 또 살아볼 용기를 내며 잠이 드는 건지도. 부디 당신도 그러기를. 나쁜 건 빨리 잊고 희망의 단초만 기억하며 잠이 드시길 빈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
ラジオの時間
감독 미타니 코키
출연 카라사와 토시아키, 스즈키 쿄카
시놉시스
라디오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돼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초보작가 미야코(스즈키 교가 분). 순조로운 리허설을 지켜보며 감격에 젖는다. 이제 1시간 후면 ‘생방송’으로 자신의 작품이 방송된다는 생각에 설레어하는 그녀,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기도 전 문제가 터져나온다. 성질만 남은 왕년의 대스타 노리코(도다 케이코 분)가 극 중 이름을 바꿔달라며 버팅기는 것이다. 프로듀서인 우시지마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이름을 바꿔주기로 한다. 매사가 자기 마음대로인 노리코는 이름뿐만 아니라 직업까지 바꾸어버린다. 하지만 다른 성우들이라고 자존심이 없을 리 만무하다. 결국 드라마 속 모든 등장인물이 미국 이름으로 바뀌고 작은 어촌 마을은 미국의 뉴욕으로, 그리고 다시 시카고로 바뀌어 간다. 이 불안한 상황에서도 생방송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바뀐 드라마의 첫 장면에는 꼭 기관총 소리가 들어가야 하지만 늦은 시간 효과실은 이미 문이 잠겼고, 스탭들은 총소리를 얻기 위해 발로 뛰며 직접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첩첩산중으로 남아있다. 꼭 바닷가에서 이루어져야하는 옛 연인들의 재회, 하지만 시카고엔 바다가 없다! 결국 바닷가에서의 로맨틱한 만남은 댐붕괴 사고의 스펙터클한 재난 장면으로 바뀌고, 행복한 재회로 끝나야 하는 드라마는 점점 해피엔딩과 멀어져만 간다. 작가와 프로듀서, 그리고 성우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여가고, 이 웃기는 상황에서도 생방송은 계속 진행된다. 산으로만 올라가는 라디오 드라마 ‘운명의 여인’. 과연 그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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